* 전편 : https://53450n-jhdj.tistory.com/37?category=334180

 

 

 

 

[야 유상아] -

[김독자 요즘은 좀 어때?] -

- [점점 나아지고 있어]

- [지난주보다는...]

[그럼 다행인데] -

 

매끄러운 액정 위를 작은 손이 헤맸다. 그대로 손가락을 조금 더 달싹이다가 관둔 한수영은 한숨을 푹 쉬고는 스마트폰의 화면을 껐다. 대충 책상 어딘가에 던져두……려다가 아직 할부 기간이 많이 남았음을 상기하고선 침대 위에 고이 모셨다. , 김독자 이 녀석은 왜 이렇게 신경 쓰이게 하고 난리람. 의자에 털썩 등을 기대며 머리 뒤로 손깍지를 꼈다. 그 허여멀건 낯짝을 떠올리자면 보통은 얄미워서 주먹이 울었으나, 최근의 김독자는 그렇게 여기기엔 좀 애잔한 구석이 있었다.

 

그랬다. 김독자가 이상해졌다. 정확히는 세달 전쯤에 롯월드를 갔다 온 뒤부터 상태가 몹시 나빠졌다. 종종 멍 때리듯 허공을 헤매는 시선과, 무언가 다른 데 정신이 팔린 것처럼 집중력이 저하된 모습까지. 같은 팀에서 일하는 유상아로부터 소식은 간간이 전해 듣고 있었지만…….

 

에이 시발 내가 뭘 하고 있는 거람. 신경질적으로 용수철처럼 몸을 튕겨 일으킨 한수영은 침대 위에 모셔둔 스마트폰을 집어 들며 집을 나섰다. 김독자 녀석은 아직 근무 중일 시간이었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 녀석이 어디 그런 걸 신경 쓰는 녀석이던가. 아니나 다를까 뚜르르, 신호음이 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수화기 너머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 한수영, 나 아직 퇴근하려면……. 그 목소리가 채 끝맺어지기도 전에 한수영은 빠르게 입을 열었다. , 오늘 술 먹자. 유상아도 같이. 너네 회사 근처로 갈게.

 

***

 

크으으. 깡소주를 입에 털어 넣은 한수영이 아저씨 같은 소리를 냈다. 쿡쿡 웃는 유상아를 바라본 김독자는 제 앞에 놓인 소주잔을 들어 올리고선 잠시 망설였다. 김독자의 망설임을 귀신같이 눈치챈 한수영이 테이블에 팔을 걸쳤다.

 

, 빨리 쭉 들이켜. 마시고 잊어라 그냥.”

마시고 잊긴 뭘 잊어.”

, 또 답답하게 구네 김독자.”

 

눈을 흘긴 한수영이 재차 재촉했다. 일단 한 잔 마시고 생각해. 너 원래 술 좀 들어가기 전엔 고민 같은 거 절대 얘기 안 하잖아. 김독자는 눈을 들어 한수영을 가만히 쳐다봤다. 최근 제 상태가 이상하긴 이상했나보다. 남의 일에 휘말리는 건 딱 질색일 한수영이 이렇게까지 나설 정도면. 사실 술이 좀 땡기는 기분이기는 했다. 그래서 김독자는 첫 잔을 시원하게 비우고, 초록색 병을 들어 다시 찰랑거리도록 채웠다. , 쓰다. 절로 아저씨 같은 소리를 하자 한수영이 낄낄댔다. 목구멍을 타고 위장까지 홧홧하게 달구는 알코올의 감각에 몸이 부르르 떨렸다.

 

그래서? 고민이 뭔데?”

고민 없어.”

여기까지 와서 빼기 있냐?”

그래, 얘기해봐. 나도 걱정돼서 그래.”

 

그렇게 말하며 빙긋 웃는 유상아의 얼굴이 어쩐지 서늘했다. 당장 털어놓지 않으면 죽을 것 같다. 두 번째로 몸을 떤 김독자는 손가락으로 투명한 잔 테두리를 매만지며 어떻게 말해야 좋을지 옅은 고민에 빠졌다.

 

몇 달 전, 그러니까 정확히 세 달 전에 일어난 일이다. 이들과 함께 롯월드에 놀러 갔던 김독자는 벚꽃을 보며 점심을 먹다가 짧은 백일몽에 빠졌다. 어릴 적 몹시도 좋아했던 소설인 멸살법세계로 트립하는 꿈. 그것이 정말로 꿈이었다면 그대로 좋았을 것을. 꿈속에서 만난 멸살법의 주인공 유중혁이 김독자의 뺨에 남긴 검흔(劍痕), 꿈에서 깨어난 뒤로도 몇 주간이나 사라지지 않고 머물렀다.

 

우연의 일치라고 생각해보려 했다. 어쩌다가 같은 자리에 긁힌 상처가 난 모양이라고. 하지만…… 붉게 달아오른 자국을 매만질 때마다 선명하게 기억이 났다. 호숫가로부터 피어오르던 습기 어린 공기, 등에 닿던 나무둥치의 단단한 감촉. 그리고, 저를 올려다보며 살벌한 웃음을 띠던 어린 유중혁의 얼굴까지. 꿈일 리가 없었다. 아니, 한낱 꿈으로 치부하고 싶지 않았다. 왜냐하면, 김독자에게 있어 멸살법…….

 

김독자는 손가락의 움직임을 멈췄다. 장르소설 작가인 한수영이라면 납득할까. 늘 제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주는 유상아라면 이해할까. 그래서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너희들…… 책 빙의물이 뭔지 알아? 한수영 너는 당연히 알겠고.”

나도 알아. 요즘 장르소설에서 유행하는 그거 말이지?”

 

유상아의 말에 김독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도 부연설명은 필요 없을 것 같았다.

 

그러니까…… 그날 있잖아. 너희들이랑 같이 롯월드 갔던 날. 내가 점심 먹다가 잠깐 졸았잖아.”

. 무슨 밥을 먹다가도 조는지 어이가 없더라. 진짜 야근했냐?”

그런 거 아냐. 그때, 내가 읽었던 어떤 소설에 빙의했었거든. 정확히는 빙의는 아니고…… 책 속으로 트립했다고 해야 하나.”

 

한수영의 표정이 요상해졌고, 유상아의 눈빛은 심각해졌다. 젠장, 역시 안 믿어주는 건가. 하긴 나 같아도 안 믿었겠지만. 뭐라 더 설명해야 할지 알 수 없어 시선을 떨구고 있자 한수영이 답지 않게 신중한 어조로 고개를 기울였다.

 

그러니까…… , 뭐냐. 꿈이 아니라는 증거는 있어?”

 

행여나 미친놈 보듯이 하는 것처럼 여겨질까 조심하는 태도였다. 한숨을 푹 쉰 김독자는 제 턱과 뺨 부근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날 나 여기에 상처 났었잖아. 그게 꿈에서 주인공이 내 얼굴에 낸 상처 부위랑 똑같아.”

…….”

 

설득력이 부족했다. 알고 있었다. 알고 있었기에 지금껏 이들에게도 말하지 않고 혼자서만 고민해 온 것이 아니던가. 역시 내가 미친 걸까. 정말 그건 다 꿈이었던 걸까? 이마를 짚으며 미간을 꾹꾹 문질렀다. 두 사람은 김독자의 말을 온전히 믿는 눈치는 아니었지만, 시무룩한 표정만큼은 진짜라고 느꼈는지 위로의 말을 주섬주섬 늘어놓았다.

 

이상한 경험 했네. 고생했다…… . 흠흠.”

그런데, 그게 왜? 그 속에서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 뭐 때문에 그렇게 고민하는 거야.”

 

그러게, 왜일까.

한 줄로 정리해서 설명할 수 없었다. 김독자에게 있어 멸살법이 가지는 의미가 무엇인지는 그 자신 외에 누구도 알지 못한다. 아마 이수경조차도 명확히 짚어낼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 확실한 것은, ‘멸살법은 김독자 탓에 끔찍하게 파멸적인 결말을 맞이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계속해서 가슴이 무거웠다. 만약 멸살법의 세계가 실존한다면. 나는…… 그 세계에 책임이 있는 것이다. 나는, 그 멸망한 세계에서 죽어갈 유중혁에게 책임이 있다.

 

유중혁은 내가 해준 말을 지켰을까. 이지혜를 찾아서, 해상전을 무사히 치렀을까? 그렇다면 원작으로부터 안배된 파멸의 길에서 조금은 멀어질 수 있었을 텐데. 확인할 길이 없어서 초조했다. 그 세계는, 지금쯤 어떻게 되어가고 있을까.

 

그런 이야기를, 모두 털어놓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김독자는 잔을 들어 올렸다. 짠 하자, .

 

***

 

우욱…….”

 

머리가 핑 돌았다. , 빌어먹을 숙취. 어제는 반병도 안 마신 것 같은데, 몇 주간 줄곧 피곤했던 탓인지 더 빨리 취해버렸다. 세 잔째까진 제대로 기억이 나는데. 물론 두 번째 잔과 세 번째 잔을 연달아서 마시기는 했다. 유상아랑 한수영은 잘 들어갔나? 김독자는 지난 밤을 되짚으며 잔뜩 찡그렸던 눈을 반짝 떴다. 속이 안 좋…….

 

……?”

 

낯선 천장-그렇게밖에 표현할 길이 없었다-의 모습에 김독자는 눈을 껌뻑거렸다. 상앗빛 천장에 매달린 수려한 조각 장식 등불이 은은한 빛을 흩뿌리고 있었다. 왜 형광등이 아니라 등불이지? 그러니까, 내 방 천장은 이렇게 높지도 않고 화려하지도 않고 침대가 이렇게 푹신하지도 않은데…….

 

. 김독자는 벌떡 몸을 일으켜 앉았다. 그와 동시에 찡하고 머리가 깨질 듯한 숙취와 두통이 몰려왔다. 앓는 소리를 내며 이마를 감싸 쥐고 있는데 달칵, 하며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힘겹게 고개를 들어 쳐다보니 어깨에 날렵한 칼을 걸친 채로 당당히 선 작은 인영(人影)이었다. 높이 올려 묶은 긴 머리카락과 장난기 어린 눈매. 고작 열너덧 살 쯤 되었을까. 김독자와 눈이 마주친 아직 앳된 얼굴의 아이가 어, 하는 소리를 내더니 씨익 웃었다.

 

이 아저씨 드디어 일어났네? 이제 술 냄새는 좀 덜 나나?”

 

……초면부터 아저씨에 술 냄새에다 반말의 쓰리 콤보라니. 김독자는 무어라 입을 열려다 그만두었다. 반박하기엔 여전히 머리가 아파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을 뿐이지만. 하지만 여전히 지끈거리는 두통 속에서도 알 수 있는 것이 몇 가지 있었다.

 

그러니까, 나는…… 다시 멸살법의 세계에 들어왔구나.

 

그렇게 확신하는 것만으로도 어쩐지 가슴이 조금 뭉클해졌다. 어떻게 다시 여기에 올 수 있었는지 경위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느껴질 정도로. 심장 박동이 일정한 간격으로 귓가를 울렸다. 마치, 있어야 할 곳을 찾은 것처럼 안정된 느낌. 어째서 늘 이런 느낌을 받게 되는 걸까. 이유야 알 것도 같았지만.

 

그리고 또 하나. 지금 김독자의 눈앞에 있는 이 아이는…… 이지혜가 틀림없었다.

 

해상전신(海上戰神) 이지혜. ‘멸살법작중에서 일어나는 해상전은 단 한 번을 제외하고는 모두 이지혜가 속한 편이 승리한다. 천부적으로 물길을 읽는 힘을 타고난 아이. ‘멸살법의 묘사에 따르면, 바다 위를 흐르는 바람의 방향을 가늠하는 것도 그에게는 숨 쉬듯 쉬운 일이라고 했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한지는 멸살법에서도 자세히 묘사된 바가 없었다. 이지혜도 늘 그냥 감이야따위의 대답만을 할 뿐이었고.

 

이지혜에 대한 정보를 가만히 떠올리던 김독자는 문득 이상한 점을 깨닫고 고개를 갸웃했다. 가만…… 태풍대첩(颱風大捷)이 일어날 때 이지혜는 고작 열두 살 남짓한 나이일 텐데. 어째서 그보다 더 나이를 먹은 상태인 거지? 저번에 유중혁을 만났을 때의 시점이라면 이지혜는 그보다도 더 어려야 하는데……. 눈을 가늘게 뜨자 이지혜가 엥, 하는 소리를 내며 문 안쪽으로 걸음을 옮겨 놓았다.

 

아저씨? 아직도 숙취가 덜 가셨어?”

 

그런 거 아니거든. 하지만 떠오른 의문에 그럴싸한 가설을 내놓기도 전에, 낮은 목소리가 그의 뒤편에서 울렸다.

 

비켜라, 이지혜.”

 

, 하고 심장이 내려앉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 사부 언제 왔어? 그렇게 말하는 이지혜의 어깨를 가볍게 짚고 들어서는 훤칠한 키의 남자. 새카맣고 짙은 눈썹 아래 시원하게 뻗은 눈매, 그 안에 자리한 섬연한 눈동자가 여름 더위도 단숨에 얼려버릴 정도로 서늘했다. 날카로운 콧날과 각 잡힌 얼굴선이 강인하면서도 동시에 미려한 느낌을 준다. 굳게 다물린 입술과 머리카락 아래로 드러난 귓바퀴마저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한 조각과 같은 모양새였다. 밀려난 이지혜를 일별한 남자가 김독자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 하고 숨을 들이켠 김독자는 그제서야 자신이 숨을 멈추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눈이 마주친 남자는 뭐라 형용하기 어려운 표정을 하더니 성큼성큼 걸어 김독자가 앉아 있는 침대로 다가왔다. 군더더기라곤 하나도 없는 몸의 움직임을 따라 감색 의복 자락이 유려한 곡선을 그리며 흩어졌다. 떡 벌어진 어깨와 가슴으로부터 부드러이 떨어지는 의복을 너비가 넓은 허리끈으로 묶어 고정해 역삼각형인 몸의 윤곽이 여과 없이 드러났다. 침상 옆의 의자에 앉은 남자가 손에 들고 있던 검을 무릎 위에 올려두고선 팔짱을 꼈다. 반소매 아래로 드러난 팔뚝에는 흉터가 드문드문 남아 있었다. 이윽고 가지런히 닫혀 있던 남자의 입이 열렸다.

 

오랜만이군. 김독자.”

 

, 젠장. 그 말에, 결국 김독자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 녀석이…… 유중혁이라는 것을.

대체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며 어버버하고 있자 눈썹을 들썩인 유중혁이 말했다.

 

“5년 만인데 네놈은 나이를 전혀 먹지 않은 것 같은 얼굴이군.”

“5?”

 

저도 모르게 되묻고서야 김독자는 상황을 이해했다. 그렇지, 내가 다시 멸살법세계로 들어올 때…… 어느 시점에 떨어질지는 내가 정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5년이라니. 간극이 너무 심하지 않은가. 김독자는 새삼스러운 기분으로 유중혁의 모습을 위아래로 훑었다. 나보다 쪼끄맸던 꼬맹이가 5년 만에 이렇게 됐단 말이지. 그럼 지금은 열여덟이라는 건가. 이젠 나보다도 키가 훌쩍 클 것 같은데.

 

갑자기 파핰, 하는 웃음소리가 들려 김독자는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유중혁 뒤에 와서 선 이지혜가 낄낄거리며 웃고 있었다.

 

아저씨, 진짜 사부가 말한 거랑 똑같네.”

……뭐가?”

아저씨 진짜 이상한 사람이랬거든. 간도 크고. 꼭 다른 세계에서 온 사람 같다고 했던가.”

 

왠지 찔려서 잠깐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이내 김독자는 씩 웃으며 이지혜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나 다른 세계에서 온 사람 맞아. 예언자거든.”

뭐어? 거짓말.”

진짜야. 네가 이지혜지? 나는 다 알아.”

아저씨. 요즘 서울(書蔚)에서 내 얼굴 모르는 사람 없거든요.”

난 다른 세계에서 왔다니까? 서울도 지금 5년 만에 온 거라고. 5년 전에도 유명했어? 아니잖아.”

 

능청스레 대답하자 얼떨결에 넘어간 이지혜가 그런가? 하는 표정을 했다. 보다 못했는지 유중혁이 시퍼런 어조로 대화를 끊어냈다.

 

헛소리는 그쯤 해둬라.”

헛소리라니. 섭하게.”

 

빙긋 웃으며 뭐라고 더 나불대려던 김독자는 뚝, 하고 말을 멈췄다. 목에 닿아오는 서늘한 금속의 감촉 때문이었다. 이 미친, 유중혁 새끼야! 성깔 어디 안 가네! 스릉, 하는 검명(劍鳴)조차 없이 순식간에 겨누어진 은빛 칼날에 김독자는 천천히 호흡을 골랐다. 삽시간에 배어 나온 식은땀으로 등골이 차갑게 물들었다. 침착해야 한다. 이 세계가 진짜라면, 내가 여기서 죽었을 때 어떻게 될지도 알 수 없다. 정말로…… 죽을 수도 있다. 곧 유중혁의 낮은 목소리가 검신(劍身)을 찌르르하게 울렸다.

 

김독자. 정체를 밝혀라.”

……무슨 정체?”

 

질문으로 답하자 칼날의 새파란 기운이 더욱 강해졌다. , 젠장. 분명히 살갗에 아슬하게 닿아 있다고 생각했는데, 조금 전엔 닿아있던 것도 아니었던 모양이다. 이제야…… 진짜 차가운 금속의 감각이 느껴지고 있으니. 하여간 귀신같은 놈. 마주친 유중혁의 눈에서 황금빛 불길이 일렁이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속으로 숨을 고른 김독자는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띄웠다.

 

유중혁. 일단 이것부터 치우고 말해.”

내가 왜 그래야 하지?”

치우기 전엔 대답 안 해.”

아니. 당장 대답하지 않으면 목을 치겠다.”

쳐 보든가.”

 

당당하게 대꾸하며 고개를 쳐들자 유중혁이 눈을 가늘게 떴다. 의중을 가늠하는 듯한 시선이었다. 그와 함께 눈동자 위로 감돌던 황금빛이 더욱 짙어졌다. 착각이 아니었나? 하지만 김독자는 굴하지 않고 그의 시선을 그대로 받아냈다. 제가 아는 유중혁이라면, 이 정도 배짱은 부려줘야 납득할 것이다.

 

내가 아는 예언자는 네놈과 같은 방식으로 예언을 하지 않는다.”

예언자라고 다 똑같은 줄 아냐? 다시 말하지만, 이거 치우기 전엔 더 이상 말 안 할 거야.”

…….”

 

한참이나 김독자를 노려보던 유중혁이 뽑아 들 때만큼이나 빠른 속도로 검을 검집 속에 집어넣었다. 뒤에 선 이지혜가 휴, 하고 안도의 한숨을 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지혜와 똑같은 심정으로 마음속 깊은 곳에서 한숨을 뱉은 김독자는 괜히 옷매무새를 정돈하며 목을 가다듬었다. 이제 보니 옷은 또…… 어제 술 마시고 집에 들어갔던 복장 그대로잖아. 젠장, 다른 세계에서 왔다고 동네방네 광고를 하고 다니는 꼴이다. 흰색 반소매 와이셔츠 깃을 매만진 김독자는 다시 유중혁을 바라보았다. 대답해라, 라고 눈으로 말하는 녀석에게 피식 웃어주고선 입을 열었다.

 

“5년 만에 자기소개를 다시 하자면, 유중혁. 나는 예언자야.”

제대로 설명하라고 했다.”

네가 아는 예언자는 안나를 말하는 거지?”

 

유중혁의 표정이 크게 꿈틀했다. 인마, 그러게 그냥 적당히 납득하고 넘어가면 좋잖아. 하여간 의심 많은 놈.

 

“5년 전 그때도 그렇고, 지금까지도 네 목숨을 노리고 있는 왕세자잖아. 예언의 힘을 가지고 차라투스트라라는 집단을 이끌며 사람들로부터도 절대적인 지지를 얻고 있는 녀석.”

……어떻게 거기까지 알고 있지? ‘차라투스트라에 대한 사항은 아는 놈들이 거의 없다.”

몇 번이나 말해야 믿어줄 거냐? 나는 예언자라니까.”

 

유중혁의 미간에 깊은 고민이 어렸다. 물론 고민스러울 터였다. 김독자가 말하는 것들은 분명 극소수의 인간들만 알고 있는 비밀스런 정보이긴 하지만, 이런 것들만으로 예언자라 단정할 수는 없다. 그래서 김독자는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내가 예언자인 걸 안 믿었으면 이지혜는 왜 찾아냈어?”

……전력에 도움이 될 거라 생각했을 뿐이다.”

어쨌든 내가 한 말 듣고 찾으러 간 거 맞잖아?”

 

반박할 말이 없는지 유중혁은 몹시도 심기가 불편한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씩 웃으며 고개를 크게 끄덕여준 김독자는 사뭇 진지한 어조로 계속해서 말했다.

 

유중혁. 나는 네 편이야. 지난번에도 말했듯, 나는 너의 가장 큰 전력이 되어줄 수 있다.”

내가 그걸 어떻게 믿지?”

내가 너를 어떻게 납득시켜야 하는데?”

그건 네놈이 방법을 찾아야 할 일이다. 내게는 의무가 없지.”

 

이 자식, 이럴 땐 또 맞는 말을 하고 앉았어. , 하고 앓는 소리를 낸 김독자는 인상을 쓴 채 입가를 매만졌다. 어떻게 해야 이 녀석이 나를 믿어줄까……. 애초에 의심이 많은 놈이니 온전히 동료로 인정해 줄 거란 기대는 하지도 않았다. 그냥, 적어도 적군은 아니라는 것만 납득해준다면. 팽팽 머리가 돌아가는 소리가 나도록 굴려봤지만 당장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앞으로 일어날 일들이야 줄줄 꿰고 있었지만 곧바로 증명해낼 수 있는 것도 없고. 그래서 김독자는 다시 얼굴에 미소를 띄웠다.

 

내가 증명할 수 있게 시간을 줘.”

 

며칠 있다 보면 적당한 게 생각나겠지.

 

***

 

김독자는 넓디넓은 파천군(派川君) 궁 내부를 이리저리 헤매고 있었다. 아니, 이 자식은 절대다수인 왕세자파에 밀려서 유배되다시피 살고 있는 주제에 궁은 또 왜 이렇게 넓어. 물론 이 대륙은 지구나 대한민국처럼 땅이 좁아 허덕이지 않으니 건물들의 규모가 큼지막한 것이 당연한 수순이기는 했다. 또한, 이곳은 이미 신체적으로는 인간의 한계치에 도달한 유중혁이 기거하는 곳이므로 넓다고 해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을 터였다. 하지만 김독자에게는 그것이 대단히 큰 난관이었다.

 

여기가 대체 어디야?”

 

젠장. 입학식 때 자리를 잘못 찾았던 기억이 고스란히 떠올랐다. 미노소프트 입사 시험에서 길을 잃었던 것까지도. 김독자는 거기가 거기인 것처럼 느껴지는 똑같은 돌벽을 유심히 들여다봤다. 이거 참, 벽에다가 표시를 하면서 다닐 수도 없고. , 하며 입맛을 다신 김독자는 결국 포기하고 되는대로 걷기 시작했다. 성류국(星流國) 또한 대한민국처럼 사계절이 있다더니, 여름 햇빛이 꼭 한국의 그것처럼 쨍쨍하고 더웠다. 조금 걸었을 뿐인데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유중혁 이 녀석은 어디 나갔다는 말은 없었으니 이 궁 어딘가에 있을 텐데 정말이지 찾기가 어려웠다. 하다못해 이지혜나 이현성이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둘은 출타 중이라고 했다. 다른 사람이라도 붙잡고 물어볼까? 하지만…….

 

그 둘과 유중혁 외에는, 누구도 믿어선 안 된다.

 

김독자는 조금 긴장한 심정으로 침을 꿀꺽 삼켰다. 유중혁의 주변은 온통 위험투성이다. 왕세자파 놈들은 언제고 유중혁과 그의 사람들을 죽이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유중혁은 파천문(破天門)의 혹독한 수련을 받으며 자란 덕에 웬만한 독이나 함정에는 끄떡도 하지 않는 금강불괴(金剛不壞)의 몸이었으나 그의 주변인들도 모두 그러하지는 않았다. 작중에서 유중혁이 저와 가까운 사람들을 잃고 미쳐버린 것이 어디 한두 번이었던가. 그때마다 주변에 피바람을 불러일으킨 덕에 작중 후반부에서는 철혈(鐵血)의 패왕(覇王)이라는 별칭까지 붙었었다.

 

그리고, 안나와 차라투스트라는 상대의 약점을 훌륭히 공략할 줄 아는 난놈들이었다. 그러니 일단은 낯선 땅에서 유중혁의 비호 아래 놓여있는 김독자로서는 몸을 사려야만 했다. 그의 존재 자체가 유중혁에게 약점이 될 수도 있었으니까. , 물론 유중혁은 김독자를 그렇게 소중히 여기지는 않을 터였지만. 내가 인질로 잡히면 죽이든지 말든지 맘대로 해라, 나와는 상관없다.’ 그딴 말이나 하지 않을까?

 

실없이 웃은 김독자는 고즈넉히 꾸며진 길을 걸으며 곰곰이 멸살법의 전개를 떠올렸다. ‘멸살법은 크게 1부와 2부로 전개가 나뉘어 있었다. 1부는 왕세자파와 맞서는 내용, 2부는 외계에서 침범해 오는 이계의 존재들에 맞서는 내용으로. 기억이 틀리지 않는다면, 분명 1부는 유중혁이 왕위에 오르며 끝난다. 하지만 그것은 유중혁이 자신의 세력을 모아 왕세자파의 탄압을 이겨내는 흔한 전개가 아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계의 존재들이 대륙을 강습한 탓에 안나가 살해되고 왕세자파가 와해되어 얼떨결에 유중혁이 왕이 되는 전개였지. 그 과정에 분명 개연성은 있었지만, 김독자는 그러한 전개에 그다지 만족하지는 않았다. 어찌 되었든 원작의 유중혁은 숱하게 많은 이들을 살해했으며, 그럼에도 결과적으로 제 손으로 왕위를 얻어내지 못한 것을 두고두고 후회했으니까. 그 과정에서 자신의 사람들을 잃은 것들 또한 뼛속 깊이 사무치게 새겼던 것도 사실이고. 그 자식, 냉혈한인지 무른 녀석인지 잘 모르겠단 말이지.

 

그래서 그때, 유중혁에게 이지혜를 찾으라고 조언했던 거였다. 자신의 손으로 왕위를 쟁취하기 위해 유중혁이 해야 할 일은 세력을 부풀리는 것이다. 유중혁은 그 뛰어난 능력치에 비해 백성들에게 지나치게 저평가되는 면이 있었다. 그러한 민심을 조장한 것이 왕세자파라는 것은 두말해야 잔소리고. 애초에 덩치가 너무 크게 차이 나는 채로 싸움을 시작한 탓에 유중혁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단신으로 아무리 공을 세워도 그 공을 치켜세워줄 이가 없으니 당연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해상전신 이지혜의 이름은 진도(眞島) 사람들 사이에선 절대적이다. 지금으로부터 3년 전에 있었을 태풍대첩에서 바다 너머로부터 밀려오는 서(西)대륙을 막아내는 위업을 세웠으니. 어린 나이 탓에 직접 전장에 서지는 않았다 해도 오히려 그런 점이 신비감을 부추기는 법이다. 수수께끼의 힘을 발휘해 해상을 지배하는 어린아이라니, 전설이 되기 딱 좋은 구도 아닌가. 그렇게 전설이 된 이지혜를 거둔 것이 유중혁이다? 그것은 틀림없이 그에게 큰 힘이 되어줄 것이었다.

 

, 5년이나 지나서 돌아올 줄 알았더라면 조금 더 이런저런 조언을 해주고 가는 거였는데. 신유승이라든가, 이설화라든가……. , 그럴 만한 시간도 없기는 했지만.

 

한참이나 생각에 잠겨 걷던 김독자는 퍼뜩 고개를 들었다. 얼마나 걸어온 거지? 걸음을 멈추고 주변을 휘 둘러봤다. 어째 눈이 조금 부시다 했더니 궁 안에 자리한 뱃놀이용 작은 호수가 여름 햇살을 한껏 반사하고 있었다. 호숫가를 빙 둘러 꽃잎에 노르스름한 기를 띤 수국이 즐비하게 피어 있었다. 나뭇가지에 살며시 내려앉은 이름 모를 새가 작게 지저귀었다. 몹시도 평화로운 풍경이었다. 그리고, 커다란 그늘을 드리운 정자 안에 그렇게 찾던 이가 앉아 있었다.

 

유중혁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의자가 아닌 정자의 난간에 걸터앉아 호수의 표면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등은 기둥에 기대고, 한쪽 다리는 난간 밖으로 내리고 있는 것이 얼핏 보기엔 몹시도 위태로운 자세였으나 김독자는 유중혁이 고작 균형 따위를 잡지 못해 물에 빠질 일은 절대 없을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처음 본 날과는 조금 모양새가 다른 의복을 입고 있었지만 여전히 옷의 빛깔은 감색이었다. 어째서 굳이 감색만 고집하는 걸까, 지금 생각하니 조금 의아하기는 했지만 그야말로 맞춤처럼 잘 어울리는 색이었으므로 김독자는 속으로 어깨만 으쓱했다. 허리춤에는 예의 그 검집이 매달려 있었고, 손에는…… 저건, 피리인가? 저 녀석, 악기도 잘 다룬다고 했었던가.

 

김독자는 야, 유중혁, 하고 멀리서 부를까 하다가 그냥 조용히 다가가기로 마음먹었다. 애초에 이 정도 거리까지 접근했는데 유중혁이 제 기척을 모를 리가 없었다. 알면서도 모른 척하고 있는 거겠지. 김독자는 연한 노란빛 의복을 팔랑이며 정자를 향해 걸어갔다. 잔잔한 호수 표면 위로 유중혁의 우수 어린 얼굴이 비쳤다. , 쓸데없이 잘생긴 새끼. 열세 살이었을 적의 얼굴이랑 비교하면…… 이렇게 말하긴 좀 우습긴 하지만, 잘 컸다고 해야 하나. 실없는 생각을 한 김독자는 피식 웃으며 정자 위로 발을 내디뎠다. 끼익, 잘 짜여진 나무판이 하중을 싣고 옅은 소리를 냈다.

 

여기서 뭐하냐?”

 

유중혁은 대답이 없었다. 심지어 돌아보지도 않았다. 까칠한 새끼. 물론 김독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더 가까이 다가가 유중혁이 걸터앉아 있는 난간 옆의 의자에 털썩 앉았다. 나무 난간에 팔을 올리고 기웃거리며 올려다보자 그제야 유중혁이 고개를 돌렸다.

 

어지간히도 할 일이 없는 모양이지.”

그건 내가 할 소린데.”

나는 네놈과는 달리 한가하지 않다.”

그럼 지금은 뭘 하고 있는 건데?”

“‘차라투스트라를 쳐부술 계획을 세우는 중이다.”

 

, 그러셔. 김독자는 씩 웃으며 눈을 가늘게 떴다. 유중혁이 몹시도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가 다시 호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래서? 계획은 세웠어? 얘기 좀 해봐.”

내가 왜 네놈에게 계획을 떠벌려야 하나.”

내가 도와줄 수도 있잖아. 아직도 내가 예언자인 거 못 믿어?”

예언자인 것까진 믿는다 쳐도, 내 편이라는 건 믿을 수 없다.”

그럼 일단 예언자인 건 믿어준다는 거지?”

내가 언제……

 

성난 어조로 김독자를 향해 몸을 홱 돌린 유중혁이 말을 멈추고선 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뭐야, 왜 그렇게 보냐. 이내 유중혁은 더 보기 싫다는 듯 눈을 감아버리고선 머리를 기둥에 기댔다.

 

실실 웃지 마라. 못생겼군.”

 

이 자식이……. 울컥한 김독자는 무어라 쏘아붙이려다 그냥 웃어버렸다. 이 녀석 이런 말도 할 줄 알았나. 김독자의 머릿속에 가장 강렬히 남아 있는 유중혁의 인상은 원작 후반부의 모습이었다. 인내를 상실하고, 이지를 잃고, 모든 것을 놓친 비극에 미쳐버린 채로 앞을 가로막는 것을 닥치는 대로 베어 넘기던, 온몸에 피칠갑을 한 유중혁. 하지만 이렇게 아직 성년도 되기 전의 유중혁을 눈앞에 놓고 보자니 옛 기억이 새록새록 되살아났다. 그래, 나는 분명 이때의 유중혁을 정말 좋아했었다.

 

그리고, 가능하면 그렇게 끔찍한 최후를 맞이하지 않길 바랐다.

 

나 없는 5년 동안 어떻게 지냈어?”

…….”

 

듣지 못한 양 말이 없던 유중혁은 한참이나 뒤에 스르르 눈을 떴다. 저를 바라보는 새카만 눈동자를 보며 김독자는 어쩐지 긴장해 몸을 똑바로 세웠다. 유중혁의 입이 열리고 무거운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어떻게 지냈느냐고.”

…….”

예언자 주제에 그런 것도 모르나.”

 

, 이 자식. 억울하네……. 네가 감히 멸살법최고 권위자인 날 무시하는 거냐. 김독자는 미간을 찌푸리며 생각했다. 이지혜라는 변수가 들어서긴 했지만, 작금의 상황을 종합해봤을 때 원작에서 크게 궤도가 틀어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니 유중혁이 지난 5년간 어떻게 살아왔을지도 자연스레 알 수 있었다.

 

힘든 시간이었을 터다. 왕세자파는 유중혁을 음해했고, 백성들은 유중혁을 두려워했다. 믿을 수 있는 제 편이라곤 몇 있지도 않은 유년기를 보낸 유중혁의 정신 건강 상태가 개복치만큼이나 연약해진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원작에서도 몇 번이나 전부 죽여버리고 싶은 충동에 시달렸던 유중혁이 아닌가. 실제로 그럴 만한 충분한 능력이 있기도 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중혁이 그런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 않은 것은, 아직까지 인간성이 살아있기 때문이었다. 죄 없는 이들을 모조리 죽이고 왕이 되어봤자 제게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알고 있으니까. 유중혁은 대의(大義)가 무엇인지 아는 녀석이다. 그리고 사실상 그것만이 그를 지탱하는 근간이라 해도 될 법했다.

 

그때, 문득 스쳐 지나간 어떤 생각에 김독자는 머리 위로 전구를 띄웠다. 그러고 보니…… 이 녀석의 신뢰를 얻을 방법이 있을 것도 같았다.

 

유중혁.”

…….”

, 그 검. 부러졌지?”

 

유중혁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반사적으로 손아귀에 검집을 꽉 쥐고선 흉흉한 기세가 깃든 눈길을 보낸다. , 그렇게 봐서 어쩔 건데. 태풍대첩에서 이러이러한 사건을 겪어 부러졌다는 것까지 읊어 주랴?

 

어떻게 알고 있냐고 묻지 마. 예언자라서 안다고 대답할 거니까.”

……성가신 놈.”

어쨌든, 들어봐. 네 진천패도(振天覇刀)는 어차피 못 고치는 상태야. 그렇게 대충 붙여놓은 걸로는 얼마 못 갈걸. 새 칼이 필요하지 않겠어?”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냐.”

내가 구해다 줄게. 흑천마도(黑天魔刀).”

 

유중혁의 표정이 재차 변했다. 역시, 명검의 명성이란 대단하네. 일순 번뜩였던 유중혁의 눈동자는 다시 차분히 가라앉아 있었다.

 

김독자. 흑천마도를 구하는 방법에 대해서 알고는 있는 건가?”

, 알지. 모르면서 얘기를 꺼냈을까봐?”

그 팔문금쇄진(八門金鎖陳)은 수백 년간 파훼된 역사가 없다. 그것도 알고 있겠지.”

유중혁.”

 

김독자는 빙긋 웃었다. , 아직도 나를 잘 모르는구나. 못 할 일이면 얘기도 안 꺼냈어. 담담한 목소리에 유중혁이 짧게 침묵했다.

 

죽을 거다.”

안 죽어.”

 

지켜보기나 해. 그렇게 말하며 김독자는 기지개를 쭉 켰다. 그리고 손가락 끝으로 유중혁의 손에 들린 피리를 가리켰다. 그거 한 번 불어줄 생각은 없어? 당연하게도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

 

며칠 뒤, 김독자는 인적이 드문 산기슭의 뿌연 안개 앞에 서서 숨을 골랐다. 마치 의지를 가진 것처럼 둥실둥실 흔들리고 있는 희끄무레한 안개 덩어리들이 음산하게 움직였다. 조금 겁먹은 듯한 이지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저씨, 지금이라도 포기하는 게 어때? 저기 들어갔다가 살아서 나온 사람이 없다고.”

 

김독자는 대답하지 않은 채 어깨를 으쓱였다. 그 곁에 서 있던 이현성도 위험합니다, 다시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하고 말렸으나 김독자는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당연하게도 김독자는 이 팔문금쇄진의 파훼법을 알고 있었다. ‘멸살법의 유중혁이 스물두 살에 이것을 뚫고 흑천마도를 얻는 장면을 본 적이 있었으니까. 사실 파훼법은 상당히 복잡한 편이었으나, 이 부분은 김독자가 몹시도 좋아하는 장면이라서 페이지가 닳도록 읽은 탓에 훤히 꿰고 있었다. 유중혁에게는 미래의 일일 정보를 제 것인 양 끌어와 쓰는 것이 어쩐지 조금 미안하게 느껴지기는 했으나 어차피 예언자라는 게 다 그런 것 아니겠느냐 싶어서 생각을 관뒀다.

 

흘긋 뒤를 돌아보았다. 고작 며칠 알고 지냈다고 그새 정이 든 것인지 이지혜가 초조한 얼굴로 발을 구르고 있었다. 비슷한 표정을 한 이현성까지 확인하고 씩 웃어준 김독자는 마지막으로 유중혁을 쳐다봤다.

 

시간이 조금 걸릴 거야. 뭐하면 궁에 먼저 돌아가 있든가.”

잔말 말고 빨리 들어가기나 해라.”

 

인정머리 없는 놈. 하지만 그러니까 유중혁인 거겠지. 김독자는 그를 향해 일부러 더 큰 미소를 지어주고선 몸을 돌렸다. 후우, 짧게 숨을 들이켜고 안개 속으로 발걸음을 옮겨 놓았다.

 

순식간에 하늘이 새카매졌다. 아니, 처음부터 하늘이 까만 공간으로 들어왔다는 표현이 옳을 것이었다. 이름값 하네. 한 치 앞도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로 시야가 깜깜해졌다. ‘멸살법의 묘사 그대로였다.

 

하늘이 먹빛으로 물들었다. 존재하지도 않는 태양을 가린 암운(暗雲)이 멀리서 우레를 울렸다. 진 밖에서 지켜보는 이들은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 길이 없으리라. 유중혁은 침착하게 걸음을 떼었다. 첫 번째는, 생문(生門).

 

김독자는 아예 눈을 감아버렸다. 어차피 보이지도 않는다. 읽은 대로만 하면 된다. 활자를 읽어내려가며 상상했던 그대로 움직이면 되는 것이다. 생문은, 이쪽이다. 날카로운 바람 소리가 귓가를 헤집었다. 보이지 않는 벽에 도달해 방향을 틀었다. (), (), (), (), (), (), 그리고 경() 순서로 이동하면 된다고 했다. 왜 널리 알려진 대로 단순히 생문에서 경문으로 이동하는 파훼법이 아니라 이런 파훼법인지는 굳이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내가 작가의 마음을 어떻게 알겠냐.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 표절 소리 듣기 싫었나 보지.

 

걸음을 옮길수록 바람 소리가 거세졌다. 희미하게 망자의 중얼거림과 울음소리가 들려오는 것도 같았다. 김독자는 호흡을 고르며 계속해서 이동했다. 아직까지는 괜찮다. 아직은. 문제는, 사문(死門)에 있을 그 함정인데…….

 

독자야.

 

김독자는 저도 모르게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끔찍하도록 귀에 익은 목소리가 머릿속을 울렸다. 독자야. 이를 악물었다. 괜찮아. 이건 옛날 일일 뿐이다. 이 세계에서 일어난 일도 아니다. 이건 그냥, 김독자라는 인간의 기억으로부터 재구성된 환상일 뿐이다. 눈앞이 붉었다. 하늘이 새빨갛게 물드는 것 같았다. 눈을 뜨기가 두려워 꾹 감은 채로 간신히 몸을 움직였다. 조금만 더. 조금만…… . . .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붉은 핏물이 번진 바닥. 내동댕이쳐진 식칼. , , 떨어지는 액체의 방울 소리. 안 돼. 안 되겠어. 더는…….

 

내가 죽을 거라고 했잖아.’

 

김독자는 눈을 번쩍 떴다. 붉은 기운은 온데간데없이 여전히 깜깜한 어둠만이 시야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 , 하하……. 허탈한 웃음이 잇새를 비집고 새어 나왔다. 유중혁, 이 새끼야. 나는…… 안 죽어. 이 이야기의…… 제대로 된 결말을 보기 전까지는.

 

왜 눈을 뜨는 것을 두려워했을까. 이제는, 그런 걸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데. 김독자는 눈을 뜬 채로 걸음을 마저 옮겼다. 마침내 경문(景門) 앞에 도달해, 실에 묶여 매달려 있는 새카만 검을 잡아챈 김독자는 진을 빠져나왔다. 아저씨! 김 대감! 이지혜와 이현성의 목소리. 그리고, 다시 밝아진 시야 안에 유중혁의 얼굴이 들어왔다. 내가 죽을 거라고 했잖아, 그렇게 입모양으로 말하던 환상과 똑같은 모습. 갑자기 밝은 곳으로 나와 흐릿해진 시야 탓에 유중혁의 표정이 어떤지는 잘 보이지 않았다. 김독자는 씩 웃으며 손에 쥔 검을 들어 올렸다. 검은 광택을 흘리는 잘 빠진 모양새의 검집이 절그럭 소리를 냈다. 유중혁, 봤냐. 이제 믿어줄 거냐? 내가 진짜 네 편이라는 걸.

 

바로 그 순간, 김독자는 석상처럼 몸을 굳혔다. 움직여.

 

온몸의 솜털이 곤두섰다. 저릿하게 날카로운 예감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를 관통하고 지나갔다.

 

움직여.

 

이건, 대체 뭐지? 하지만 머리로 이해하기도 전에 몸이 먼저 움직였다. 반드시 그래야만 했다. 유중혁! 미처 그 이름 세 글자를 다 부르기도 전에 이미 그의 앞에 서 있었고, 그리고……

 

푸욱!

 

휘청, 하고 몸이 꺾였다. 등 뒤로 바람을 가르는 날카로운 파열음이 들렸던 것도 같았다. 김독자! 지금껏 들었던 어떤 목소리보다도 당황한 듯한 유중혁의 목소리가 귀청을 때렸고, 억센 손길이 제 몸을 붙들었고, ……. 김독자는 시선을 아래로 향했다. 옆구리를 뚫고 나온 붉고 기다란 물체가 보였다. 화살인가? 그럼 그 소리는, 쇠뇌 소리였나……. 시야가 붉었다. 아까는 안 빨갛더니, 이제 와서 이러고 난리야……. 의식이 빠르게 흐려지기 시작했다. 김독자는 더듬더듬 손을 뻗어 유중혁의 소맷자락으로 추정되는 것을 붙잡았다. 유중혁…… 이설화를 찾아. 의선(醫仙) 이설화……. 다급한 목소리들이 멀어지고, 이내 김독자는 정신을 잃었다.

 

***

 

이마에 얹어지는 차가운 물건의 감각에 스르르 눈을 떴다. 깜빡. 깜빡깜빡. 수차례 눈꺼풀을 움직인 뒤에야 흐릿한 시야가 제자리를 찾았다. 눈동자만 굴려 옆을 돌아보니 흰 머리칼을 허리까지 늘어뜨린 젊은 여성이 앉아 있었다.

 

정신이 드세요?”

 

맑은 목소리였다. 김독자는 이불에 들어가 있던 팔을 빼내어 이마 위의 물수건을 집었다. 옆에 내려놓으며 몸을 일으키려 했더니 허리께로부터 뱃속을 뒤집어놓듯 긁어대는 통증에 절로 헉, 하고 숨이 막혔다. 어어, 하고 소리를 낸 여자가 김독자의 어깨를 붙잡아 꾹 눌러 다시 침대에 눕혔다. 아니, 무슨 힘이 이렇게 세. 내가 지금 힘이 없는 건가.

 

아직 움직이지 마세요. 상처가 터질 수도 있으니까.”

 

웃는 얼굴로 살벌한 소리를 하는 것을 보니 짐작하고 있는 인물이 맞는 모양이었다. 유중혁 녀석, 내 말을 허투루 듣지는 않았구나. , 하며 고개를 끄덕인 김독자는 입을 열었다.

 

이설화 씨 되십니까? 의선 이설화.”

의선이라뇨, 당치도 않은 말씀을.”

 

하지만 의원 이설화를 찾으시는 거라면, 제가 맞아요. 김독자는 새삼스러운 기분으로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멸살법을 읽으며 상상했던 모습 그대로였다. 신기할 정도로. 흘긋 시선을 내려 이불을 들쳤다. 혹시나 피가 묻어 있을까 걱정하며 조심스럽게 손을 움직였는데, 다행히도 흰옷으로 갈아 입혀져 있었다. 아니…… 잠깐만. 누가 갈아입힌 건데. ……아냐. 불길한 상상은 관두자.

 

…… 뭐에 맞은 겁니까? 화살?”

, 화살이요. 쇠뇌로 쐈는지 힘이 아주 좋은 화살이더군요. 다른 곳을 맞았다면 아주 위험할 뻔했어요. 가령 등뼈라든가…….”

 

말만 들어도 몸이 부르르 떨렸다. 진저리를 치고 있자 안심시키듯 어깨를 토닥인 이설화가 찬찬히 고개를 끄덕였다.

 

장기까지 손상되지는 않았으니까, 아물 때까지 무리만 하지 않으면 괜찮을 거예요.”

……고맙습니다.”

 

뒤늦은 인사를 건네자 이설화가 빙긋 미소지었다. 그게 제 일인걸요. 잠시 눈을 끔뻑이며 바라보고 있자니 이설화가 아, 하는 소리를 내곤 다시 입을 열었다.

 

예언자님이 깨어나면 알려달라고 하셨는데.”

……그냥 독자 씨라고 부르세요. 제 이름은 김독자입니다.”

독자 씨……?”

 

낯선 호칭인 양 고개를 갸웃거린다. 그렇겠지. 김독자는 대충 고개를 끄덕여주고선 눈을 들어 이설화 뒤편의 문을 바라보았다. 반투명한 장지문(壯紙門) 너머로 검은 인영이 어른거렸다.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이윽고 문을 열고 들어선 유중혁이 고요한 시선으로 김독자와 이설화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고개를 돌려 유중혁을 바라본 이설화는 엷게 웃으며 김독자의 손에 들린 물수건을 빼앗아 옥반(玉盤) 위에 올리고선 자리에서 일어섰다. 말씀 나누세요.

 

이설화가 소리 없이 문을 닫고 나섰지만 유중혁은 여전히 팔짱을 낀 채 문간에 서 있었다. 답지 않게 머뭇거리는 기색이기에 김독자는 픽 웃으며 턱짓으로 의자를 가리켰다. 할 말 있으면 앉아서 해. 그제야 유중혁이 성큼성큼 걸어와 의자에 앉았다. 이전처럼 무릎 위에 올려지는 검집은 빛을 빨아들이는 새카만 먹빛이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김독자는 묵묵히 유중혁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 잘생긴 얼굴에 어린 표정은 몹시도 잔잔하고 일렁임조차 없어서, 이 녀석이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길이 요원했다. 김독자 자신 또한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지 고민할 시간이 필요했으므로 그저 침묵은 계속되었다.

 

, 유중혁……

 

결국 먼저 입을 연 것은 김독자였다. 하지만 유중혁은 마치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말꼬리를 잡아챘다.

 

김독자.”

?”

왜 그런 짓을 했지?”

 

김독자는 눈을 가늘게 치떴다. 이 자식이 고맙다는 말은 못 할 망정 한다는 소리가. 하지만 유중혁은 개의치 않고 계속해서 말했다.

 

나라면 피할 수 있었다. 네놈도 알고 있었을 텐데.”

피할 수 있었다는 놈이 내가 부를 때까지 꼼짝도 안 하고 있었냐?”

 

그래, 유중혁이라면 피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 자리에 꼼짝 않고 서 있었어도, 손으로 화살을 잡아채서 부러뜨릴 수도 있는 놈이다. 하지만…….

 

……몰라. 그냥 몸이 움직였다, 인마.”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이었으니까. 화살촉이 유중혁을 향해 있다는 사실을 깨닫자마자 생각할 겨를도 없이 튕기듯 달려 나갔고, 그 결과가 이거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솔직히 조금 어이가 없기는 하다. 여기서 죽으면 진짜로 죽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으면서도 그렇게 대책 없이 움직였다니. 물론 이것만이 이유의 전부는 아니었다. 그 순간, 머릿속에서 들려온 목소리가 아직도 생생했다. 움직여. 그렇게 종용하던 목소리. 그건 뭐였지? 고작 한 단어짜리 외침이었을 뿐이지만 그 안에 깃든 감정은 몹시도 절박했다. 그 목소리를 들은 순간, 자신이 해야 할 일이 그것임을 확신했을 정도로. 유중혁이 이 화살을 맞아서는 안 된다. 이 화살에 맞는 것은 나여야 한다. 그런 생각이 들었던 기억이 선명했다.

 

하지만…… 일단 이 얘기는 안 하는 게 좋겠지. 김독자로서도 정체를 알 수가 없는 목소리인 데다, 유중혁은 저를 예언자로만 알고 있으니까. 김독자의 추측이 맞는다면, 그 목소리는 멸살법이라는 작품 자체와 관련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짧은 침묵을 어떻게 해석한 것인지, 고요한 시선을 내리꽂은 유중혁이 조용히 말했다.

 

……빚을 졌군. 언젠가 갚겠다.”

 

김독자는 피식 웃었다. 하여간 빚 지는 걸 싫어하는 놈이다. 그리고…… 끝까지 고맙다는 말은 안 하는 것도, 그야말로 유중혁다워서 웃음이 나왔다. 바람 빠진 웃음소리를 내자니 옆구리가 아파서 헉, 하고 멈출 수밖에 없었지만. 움찔 몸을 들썩인 유중혁이 다시 자세를 바르게 하고선 김독자를 바라보았다.

 

김독자.”

.”

지난 5년간 어디에 있었지?”

 

분위기 좀 좋아지나 했더니 또 취조 시작이냐. 김독자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걸 알아서 뭐 하게.”

말할 수 없는 이유라도 있는 건가?”

…….”

 

정곡을 찔러와 입을 다물었다. 대답을 고민하고 있자니 유중혁이 다시 말했다.

 

그런 거라면, 됐다. 더 이상 묻지 않겠다.”

 

김독자는 조금 얼떨떨한 심정으로 유중혁을 바라보았다. 이 자식이 이렇게 순순히 의심을 거둬주다니? 나중에 이걸로 빚 갚은 거라는 헛소리라도 하는 거 아냐? 하지만 유중혁은 더 이상 부연설명을 할 마음이 없는 듯했다. 그래서 김독자는 궁금한 것이나 물어보기로 했다.

 

유중혁. …… 내 옷은 누가 갈아입혔냐?”

…….”

아냐. 대답하지 마.”

무슨 불순한 생각을 하는 거지? 사내놈의 몸을 관음하는 취미 따윈 없다.”

 

아니 이 새끼가……. 그보다 그 대답은 네가 갈아입혔다는 거냐. 너는 왜 아랫사람을 시키지 않고……. 물론 김독자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믿을 수 있는 이가 없어서겠지. 젠장. 얼른 생각을 털어버린 김독자는 다른 것을 물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흰옷이야?”

 

성류국에서 흰색 의복은 쉬이 찾아보기 어려운 색상이었다. 그다지 인기가 없는 색인 탓이었다. 아직 흰 옷에 묻은 얼룩을 완벽히 지울 수 있는 기술이 없었으므로 만약 옷에 크게 얼룩이 진다면 새 옷을 지어 입어야 한다. 때문에 사람들은 오물이 묻어도 그다지 티가 나지 않는 어두운 빛깔의 옷을 선호했고, 밝은 빛깔의 천일수록 생활복이 아니라 예복에 많이 쓰였으며 값이 비쌌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흰옷이 의미하는 바는 조금 더 특별했다. 이 나라의 관료들, 특히나 무장들은 누구도 흰옷을 입지 않는다. 핏자국이 지워지지 않기 때문이었다. , 흰옷을 입는다는 것은, 절대로 몸에 피를 묻혀서는 안 되는 이라는 뜻이었다. 이는 곧 몹시도 귀한 몸이라는 증명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유중혁이 그것을 모를 리가 없었다.

 

김독자. 네놈이 여기에 있는 한 언제까지나 다른 이의 눈을 피해서 살 수는 없다. 누군가는 네 존재를 알게 되겠지. 이미 이 궁 안에 있는 이들의 입을 타고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을 거다.”

그렇겠지.”

그래서 조만간 네 존재를 공식적으로 공표할 생각이다. 왕세자에 대항할 새로운 예언자로서.”

 

이 자식…… 나를 이용해 먹을 생각 만만이구만. , 그래도 별로 상관은 없을 터였다. 하지만 김독자에게는 중대한 문제가 있었다.

 

유중혁. 미안하지만 그건 좀 힘들 것 같은데.”

어째서지?”

그게…….”

 

, 또 어딜 좀 가봐야 할 것 같거든. 그렇게 말하며 김독자는 애매한 미소를 지었다. 뭐라 설명할 수는 없지만, 나는 곧 또 이 세계에서 튕겨 나가게 될 것이다, 그런 느낌이 손끝을 옥죄어오고 있었다. 그래서 김독자는 무어라 말하려는 유중혁을 막아 세우고 다급히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늘어놓았다.

 

일단 이설화도 확실히 네 편으로 만들어 둬. 나중에 큰 전쟁이 일어났을 때 분명히 도움이 될 거야. 다음엔 수왕(獸王) 신유승을 찾고.”

 

유중혁은 눈썹 사이를 좁히며 심각한 얼굴을 했다. 시간이 얼마 없다. 김독자는 계속해서 말했다.

 

그리고 말해두는데, 안나랑 차라투스트라놈들이 아무리 도발해와도 절대로, 충동적으로 굴지 마. 오래 기다리고, 정확한 순간을 재. 최소한의 손실로 최대한의 효과를 낼 수 있을 때까지 참는 거야. 4년 뒤에, 분명히 그 순간이 온다. 그걸 기다려. 무익한 목숨을 해쳐봤자 결국 네게 독이 될 뿐이야. 알고 있지?”

……그런 당연한 소리는 왜 하는 거지?”

 

왜 하긴, 인마. 원작의 네가 훼까닥 돌아서 다 죽인 전적이 있으니까 그렇지. 그리고 그건 결국, 유중혁의 삶과 이 세계 전체를 비극으로 몰아넣는 발판이 된다. 그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됐다. 절대로. 그렇게 생각한 순간, 어떤 깨달음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 어쩌면 지금 이건…… 나한테 주어진, 새로운 기회일지도 모른다.

내가 망쳐놓은 이 세계를, 바른 궤도로 돌려놓을 수 있는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

 

웃음이 나왔다. 웃으면 유중혁 녀석이 이상하게 볼 거란 걸 알고 있는데도 멈출 수가 없었다. 유중혁. 나도 드디어…… 네가 제대로 된 결말을 맞이하는 걸 볼 수 있을까. 그 마지막 순간에, 나는 이 세계에 있을 수 있을까? 그럴 수만 있다면 정말로 좋을 텐데. 유중혁. ‘멸살법은 내 인생이었고, 나의 버팀목이었고. 그리고, 그리고…….

 

눈앞이 흐릿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유중혁의 동공이 확장됐다. 김독자! 그렇게 부르는 이의 손에 점차로 투명해져 가는 제 손을 얹으며, 김독자는 웃었다.

 

다시 만나자, 유중혁.”

 

시야가 완전히 끊어졌다.

 

***

 

다시 눈을 떴을 때, 김독자는 익숙한 제 방 침대 매트리스 위에 누워 있었다. 각도가 삐딱한 것을 보니 딱 술에 꼴아 침대에 대충 드러누운 모양새였다. , 저번처럼 딱 그 시점으로 돌아왔나 보네. 분명히 그 세계에서 며칠이나 되는 시간을 보냈는데, 현실에서는 1초도 지나지 않은 걸까. 문득 허리께에 통증이 느껴졌다. , 시발, 그렇지. 상처도 그대로 오는 거였지……. 하지만 그런 생각도 잠시였다. 김독자는 제 몸에 휘감겨오는 낯선 의복의 감촉에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손을 들어 올려 옷소매를 확인했다. 하얀 옷자락이 스르르 흘러내렸다.

 

말도 안 돼. 김독자는 잘 움직이지 않는 몸을 움직여 간신히 거울 앞에 섰다. 거울 속에는, 아무리 봐도 이 세계의 복식이라곤 믿을 수 없는, 낯선 옷을 입은 자신의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새하얗고 얇은 여름 옷감 위에 푸르스름한 수국이 수놓아진 고풍스럽고 예스런 옷. 이번에야말로 정말 꿈이 아니었다. 확실했다. 이렇게 증거도 두 가지나 있는데. 그래, 절대로 꿈이 아니다. 그 세계는, 유중혁은…… 단순한 허구가 아니다.

 

침대 위에서 뒹굴고 있는 스마트폰을 집어 들었다. 연락처 앱을 켠 김독자는 오래지 않아 찾던 이름을 발견하고선 후우, 작은 숨을 내쉬었다. 여전히 두려웠고, 꺼려졌고, 망설여졌지만…… 이제는 더 이상 미룰 수가 없었다. 아니, 미룰 생각이 없었다.

 

내일은, 이수경에게 연락을 해야겠다. 그렇게 생각하며 김독자는 의복의 허리끈을 풀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