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시나리오가 끝난 세계는 무엇이 남는가?’

 

어찌 보면 당연한 것들을 그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 누구도 자신을 억압하던 세계에 남는 선택은 하지 않았을 테니까. 사람들은 당연하다는 듯 이야기의 끝은 해방이고 새로운 세상에서 사는 것을 떠올렸다. 물론 그것은 유중혁도 마찬가지였다. 모든 시나리오가 끝나 결을 맺었을 때, 해방감과 동시에 오는 공허함에 잠시 눈을 감았다. 그것도 잠시 가슴이 울렁거렸다. 불쾌감이, 아직 마무리되지 않은 것이 있다는 듯 속삭였다.

 

잊지 마라. 김독자는.’

김독자. 네가 원하던 결을 보고 모든 이야기가 끝났다. 앞으로는 나와 함께 살지.”

 

곧 흩어질 것만 같은 이를 품에 끌어안았다. 제발. 아니라고 말해라, 김독자.

 

중혁아, 내가 예전에 했던 말 기억해?”

, 무슨 헛소릴.”

 

입술을 감싼 따스한 촉감이 잠시 머물다 떠나갔다. 마치, 네가 나에게 주는 마지막 선물이라도 되는 듯 웃는 모습까지 하나같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런 식으로 너는 또, 나를. 쫓아간 시선 끝에는 줄곧 증오했던 검은색 날개가 새하얀 코트 위에 솟아나는 것이 보였다. 손 사이로 빠져나가는 코트자락을 꽉 잡아봤지만 이내 손에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꽤 오래전부터 준비했는지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개연성이 요구되었다. 관리국인가? 목구멍을 타고 올라오는 비릿한 혈액을 뱉어내며 앞으로 나아갔다. 한 발짝 내디딜 때마다 붙잡는 힘은 커졌지만, 그래도 상관없었다. 제발, 김독자. 날개에 가려진 얼굴이 듣고 싶지 않았던 말을 내뱉었다.

 

여러분, 이제 돌아갈 시간입니다.’

 

다른 이의 심장을 짓밟으며, 이별을 고한 이의 몸은 서서히 먼지가 되어 사라져 갔다. 동시에 각기 다른 핸드폰에서 울리는 소리와 함께 풍경이 변했다. 이젠, 기억조차 희미한 평화로운 세상이 기다리고 있었다.

 

 

***

 

 

일행은 다른 이들보다 늦게 일상으로 돌아갔다. 물론, 그 일상이 김독자도 원했던 것은 아니었겠지만. 그 누구도 원하지 않은 귀환이었다. 그들이, 아니 우리가 원한 것은 김독자와 함께하는 일상이었으니까. 하지만 그 누구도 쉬이 김독자를 원망하지 못했다. 보았기 때문이었다. 마지막, 헤어지기 직전, 그 찰나의 시간 지었던 표정을. 굳이 이야기하지 않았다. 분했지만, 더는 그를 데려올 방법이 없다는 것을 알기에 그의 마지막 바람을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누군가 물었다. 그를 잊은 것은 아니냐고. 그 물음에 일행은 웃으며 답했다. 어떻게 잊겠냐고, 그를. 미련한 대표를. 바뀐 현실에 적응하느라, 아니 이젠 정말로 다시 만날 수 없다는 걸 알기에 놓으려고 노력하는 거라고. 종종 일행은 모여 옛이야기를 하였다. 첫 만남 이야기부터 시나리오와 얽힌 이야기들과 자잘한 이야기 가릴 것 없이 여러 이야기가 오갔다. 유중혁은 모든 이야기를 들었다. 무엇 하나 놓칠까 작은 투덜거림까지 모두 기억했다.

 

집으로 돌아온 유중혁은 곧장 욕실로 들어가 샤워를 했다. 물기가 뚝뚝 떨어지는 머리를 수건으로 털어내고 드라이기로 머리를 잘 말린 뒤에야, 편안한 옷차림으로 갈아입을 수 있었다. 피곤이 몰려왔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결국, 탁상 위에 올려 두었던 핸드폰을 꺼내 이제는 익숙한 메시지를 띄웠다.

 

[중혁아, 흰동백꽃의 꽃말은 두 가지래. 비밀스러운 사랑과 손을 놓지 않는다는 의미의 굳은 약속. 너는 어느 쪽이 어울린다고 생각해?]

 

이딴 걸 생각할 시간에 돌아올 궁리나 하지 그랬나. 눈을 감으면 먼지가 되어 사라지던 김독자의 얼굴이 생생히 떠올랐다. 검을 들었지만, 의미는 없었다. 이미 한계까지 힘을 끌어 쓰기도 하였고, 몸을 옥죄이는 개연성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김독자가 사라지기 직전 마주한 시선 끝에는 물기를 머금은, 툭 건들면 무너질 것만 같은 얼굴이 있었다. 내 곁을 떠날 생각이었으면 그런 표정은 짓지 말았어야지. 핸드폰을 침대 한구석에 던져놓고 눈을 감았다. 김독자는 바보였으며, 그를 잊지 못해 놓지 못하는 자신도 바보였다.

 

 

***

 

 

유중혁은 주변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한 것은 단 하나뿐인 여동생을 찾아가는 것이었다. 이젠 다 컸다며 신유승과 함께 자취를 시작한 여동생은 제 얼굴을 보자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먼저 말을 꺼냈다.

 

나는 괜찮아, 오빠.”

유미아.”

아무리 눈치가 없어도 곁에서 계속 본 게 있는데 모르면 바보 아닐까?”

미안하다.”

나는, 유중혁의 동생 유미아는 강해. 그러니까 꼭 되찾아.”

…….”

나는 오빠가 이젠 행복해졌으면 하니까.”

 

늘 어리게 보았던 동생은 거기에 없었다. 힘내라는 듯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이 어색하기만 했다. 더 챙겨주지 못해서, 같이 있어 주지 못해서 미안하기만 했던 시간이었다. 좀 더 신경 써야 했는데.

 

아프지 말고 잘 지내야 한다.”

오빠도 그 아저씨랑 꼭 만나길 빌게.”

 

동생에게 가지고 있던 재산을 최소한만 남기고 모두 넘겼다. 그 증인으로는 정희원과 유상아를 세웠으며, 혹시 몰라 자신 대신 미아를 잘 보살펴 달라고 부탁까지 하였다. 그 둘은 별다른 말 없이 제 부탁을 들어주었다. 대신이라고 하기에는 부족하지만 헤어지기 전 지나가듯 한 말을 유중혁은 새겨들었다.

 

혹시 만나게 되면 한 대 세게 때려 주세요.”

, 저는 투명의자로 부탁드릴게요.”

노력해보지.”

 

챙길 짐은 그리 많지 않았다. 핸드폰과 흑천마도. 약간의 식량을 챙겨 길을 나섰다. 밖으로 나오니 새하얀 눈이 거리를 뒤덮고 있었다. 이것도 우연인가? 빠르지도, 그렇다고 느리지도 않은 발걸음으로 언젠가 그가 말했던 장소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새하얗게 뒤덮인 설원에는 하얀 동백꽃이 흐트러지게 피어있었다. 마치 절망으로 물든 세상에서 그 어떤 색으로도 물들지 않고 빛나던 김독자와 닮아서 아름다웠다. 시선이 닿는 곳마다 네가 떠올라서 그래서 더 그리웠다. 그러니 내가 찾아가야지.

 

충분히 즐겼나? 지켜보고 있다는 것 잘 안다.”

 

제 예상대로 은밀한 모략가는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다. 마치 제가 찾아올 것도 알고 있었다는 듯 기분 나쁜 웃음을 흘렸다. 그렇다고 해서 제 요구를 거부한 것도 아니었다. 예상대로 그는 흔쾌히 들어주었다. 대가를 이미 치렀다는 점이 걸렸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었으니까.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디선가 지켜보고 있을 녀석을 떠올리며 눈을 감았다. 혼자 겪는 어둠은 이제 지긋지긋했으니까.

 

 

***

 

 

눈을 뜨니 익숙한 풍경이 보였다. 시간이 꽤 흘렀는지 회색빛이었던 무너진 세상이 푸른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관리국이 사라졌음에도 시스템이나 인벤토리는 문제없이 사용되었다. 보아하니 도깨비들마저 떠났는지 고요하기만 했다. 정말 모든 게 끝났구나. 그렇게 생각하니 기분이 이상해졌다. 줄곧 끝나지 않을 것 같았던 세계의 끝은 허무할 정도로 고요하기만 했다. 이런 세계에 김독자는 혼자 남았겠지. 그리 생각하니 기분이 가라앉았다. 외로운 걸 그리 싫어하면서 늘 괜찮은 척하는 이었다. 되도록 빨리 찾아야겠지. 굳은 몸을 가볍게 풀고 몸을 움직였다.

 

유중혁은 쉴 새 없이 움직였다. 공단부터 시작해서 동호대교, 충무로, 광화문 등 김독자가 머물렀던 흔적을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방배역에 도착했을 때, 유중혁은 줄곧 잊고 있던 것을 떠올렸다. 왜 이제야 기억났는지 이상할 정도였다. 시스템이 살아있다는 걸 알았을 때 가장 먼저 확인했어야 했는데.

 

[아이템, ‘한낮의 밀회를 사용합니다.]

 

-김독자.

-지금 어디에 있지?

 

이곳의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는 알 수 없었다. 중요한 것은 한낮의 밀회가 아직 이어져 있다는 것. 그리고 예전과 달리 반송되지 않는 메시지. 그것만으로도 마음이 놓였다. 이 세계 어딘가에 김독자가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마음 놓였다. 문제는 분명 확인했음에도, 보낸 메시지에 답이 없다는 것.

 

그래, 살아있다는 것만으로 족하다. 내가 찾으면 되니까.”

 

이제는 텅 빈 공단 건물에 다시 도착한 유중혁은 빠르게 김독자의 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자신이 도착할 것을 알았다면, 그를 찾아갈 수 있게 마땅한 힌트를 두고 갔을 것이 뻔했으니까. 공단의 가장 높은 곳, 서재와 연결된 방으로 향했다. 따로 문을 잠그진 않은 모양인지 끼익소음과 함께 문이 열렸다. 오랜 시간 인적이 끊긴 방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깔끔했다. 복도를 지나 그가 머물던 침실로 들어가니 새하얀 침대 위에 붉은색 책 한 권이 놓여있었다. 제목과 지은이가 없는 붉은색 표지를 펼쳤다. 그 어떤 이야기도 적혀있지 않은 책을 한 장씩 넘겼다. 책의 중간까지 넘어갔을 때 집중하지 않으면 넘어갔을 크기의 글씨로 무언가가 적혀 있었다.

 

[너와 내가 함께 가자고 약속한 장소.]

 

침대 위에 책을 내려놓고 그대로 공단을 나섰다. 밤하늘이 유독 아름다웠던 날, 김독자와 미래에 관해 이야기 한 적이 있었다.

 

시나리오가 다 끝나면 우린 어떻게 될까?’

원래대로 돌아가겠지.’

우리는?’

너와 나는 그대로 남겠지. 네가 아끼는 이들도 마찬가지고.’

여행갈까?’

어디로.’

바다는 어때?’

남해가 낫겠군.’

?’

추위를 잘 타니까. 동해는 춥다.’

 

그때 김독자는 무슨 얼굴을 하고 있었지? 어둠에 가려진 얼굴은 분명.

 

 

***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속이 쓰렸다. 김독자가 저를 믿고 있다는 사실이 기쁘면서도 한편으로는 아팠다. 예전의 김독자는 유중혁을 사랑했다. 그것은 예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을 전제였다. 문제는 그게 자신을 믿는다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였다. 김독자는 유중혁을 믿는가? 아니. 과거의 김독자는 유중혁을 믿지 않았다. 그를 믿는다기보단 결에 대한 집착, 스타스트림에 대한 증오를 믿었다. 지금의 김독자도 그런가? 아니. 그를 닮아 날카로운 듯 보기 좋게 휘어진 글씨가 아른거렸다. 남해 가장 아름다운 곳은 어디였지? 아무리 생각해도 짚이는 곳이 없었다. 결국 근처 도시에 들려 서점으로 들어갔다. 여행 관련 서적을 모아둔 곳에서 남해 여행에 관련된 서적을 뒤적거렸다. 제주도와 부산은 제외였다. 부산은 남해라기엔 동해에 가까웠고, 제주도는 배를 타고 넘어가야했다.(그는 이런 부분에서 더더욱 꼼꼼했으니 주작신보가 없을 상황을 대비했을 것이 뻔했다.) 날개가 있는 김독자라면 가능했지만, 자신이 찾으러 올 것을 생각했다면 가지 않았을 터. 몇 권의 책을 더 뒤적거린 뒤에야 김독자가 갔을 법한 곳을 찾았다.

 

남해 독일 마을

 

근처에 미술관부터 시작해서 도서관, 전시관 등 즐길 수 있는 문화거리가 많이 있었다. 유료화로 무너진 곳도 일부 있겠지만 김독자에게 있어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을 터. 거리가 꽤 된다 한들 이동에서 자유로운 그였으니까. 얇은 지도 하나를 챙겨 가게 밖으로 나섰다. 저녁이 다가왔음에도 불구하고 밝은 밖을 보며 역시 여름이구나 싶었다. 단서를 찾았다는 사실에 마음이 놓였기 때문일까. 미친 사람처럼 김독자의 흔적만 찾고 다녔기에 몰랐던 후덥지근한 열기가 느껴졌다. 결국 주위를 둘러보다 옷가게를 찾아 들어가게 되었다. 사람의 손길이 거의 닿지 않았는지 먼지가 약간 쌓여있는 것 외에는 별다른 점이 없었다. 입고 있던 코트와 상의는 잘 개어 인벤토리에 넣고 개중 깨끗하면서도 심플한 디자인의 반팔 티셔츠를 챙겨 입었다. 옷의 질도 괜찮아 갈아입을 옷을 몇 벌 더 챙긴 뒤에야 가게를 나설 수 있었다. 근처 지형을 살펴 위치를 살피고 지도를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현재 위치는 광주. 언제 이렇게 내려왔나 싶었는데, 그만큼 김독자가 보고 싶었구나 싶어 웃음만 나왔다. 곧이다.

 

조금만 기다려라. 이제 거의 도착했으니.”

 

지도가 있으니 헤맬 일도 적었다. 주작신보가 있는 이상 지형에 구애받지 않는 몸이었기에 최단의 길을 따라갔다. 휙휙 지나는 풍경을 뒤로하고 저 멀리 보이는 섬을 향해 속도를 더 올렸다. 저곳에 김독자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

 

 

도착한 마을은 아름다웠다. 초기 의도는 독일로 파견된 이들을 위해 만든 마을이었다지만 최근에는 관광을 위주로 돌아가는 장소였다. 독일 문화와 음식, 축제 등이 유명했던가? 이젠 텅 빈 마을이었지만. 김독자는 어디에 있을까. 오는 중간중간 한낮의 밀회를 보냈지만, 답 한 번 주지 않는 이였다. 직접 찾는 수밖에 없었기에 빠르게 마을의 가장 높은 곳 즉, 입구에서 가까운 곳을 향해 움직였다.

 

야속하게도 김독자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최근 생활한 흔적이 있는 집은 몇 채 발견되었지만, 그는 없었다. 해가 저물지 않아서인지, 아니면 벌써 다른 곳으로 걸음을 옮겼는지 알 수 없었다. 어디에 있을까? 다른 곳을 찾아봐야 하나? 고민도 해보았지만 이내 접었다. 마지막으로 들어간 집에서 바로 오전까지 사용한 듯한 흔적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아직 마르지 않은 물기나 먹다 남긴 음식을 보니 한숨 놓였다. 하지만.

 

여전히 입이 짧군.”

 

그가 어질러 놓은 흔적을 치우며 밀린 빨래와 설거지를 해치웠다. 냉장고와 부엌 찬장을 여니 어디서 가져왔는지 식재료가 다양하게 있었다. 물론 인스턴트식품도 식재료라고 할 수 있다면 말이다. 부엌까지 정리하고 나니 한결 나아졌다. 뻐근한 몸을 스트레칭으로 풀고 김독자가 두고 간 소설을 펼쳤다. 어차피 할 일도 없었으니 언제 올지 모르는 그를 기다리기엔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해가 지고 느지막하게 어둑한 밤이 찾아왔다. 불을 켤까 고민했지만, 자신이 왔다는 것을 알면 도망을 갈 수 있다는 생각에 보험 삼아 불을 끈 채 소파에 몸을 기댔다. 얼마나 지났을까. 손잡이가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열린 문 사이로 희미한 달빛이 들어오는 이의 그림자를 비췄다. 불이나 켜고 닫지. 예상대로 문부터 닫더니 스위치를 찾지 못했는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이어지다 집안의 불이 켜졌다. 곧장 이리로 다가오는 발걸음에 숨을 죽였다. 심장이 뛰었다. 줄곧 보고 싶었으니까. 점점 다가오는 발소리에 맞춰 심장고동도 점점 빨라졌다. 열린 문 사이로 줄곧 보고 싶었던 얼굴이 비쳤다.

 

중혁, 아..?”

김독자.”

 

몸이, 움직였다. 그의 얼굴이 보이는 순간 의식할 틈도 없이 그를 끌어안은 뒤였다. 코끝 사이로 희미한 잉크 냄새가, 그리운 살 내음이 간지럽혔다.

 

김독자.”

.”

보고 싶었다.”

나도

 

만나면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왜 떠났는지, 왜 함께 남을 생각을 하지 않았는지. 대가는 대체 무엇이었는지. 제가 오지 않으면 어쩌려고 그런 계약을 했는지. 하나하나 다 따지고 싶었지만 품에 안긴 이를 보니 아무래도 좋았다. 김독자.

 

나는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많이 너를 사랑한다.”

만나자마자 고백이라니, 이건 좀 새롭네.”

그러니, 다시는 나를 혼자 남게 하지 마.”

이젠 다신 안 해. 솔직히 후회했거든.”

 

얼굴을 숨기려는 것인지 머리를 가슴에 파묻은 이의 목소리에는 물기가 가득했다. 바보. 하지만 책하진 않았다. 유중혁은 그런 그의 모습까지 사랑했으니까. 나는 여기에 있으니 진정하라고 말없이 쓰다듬어주었다. 소리 없는 울음이 어느 정도 멎었을 때, 먼저 입을 연 것은 김독자였다.

 

얼굴 좀 보여줘.”

품에 숨긴 얼굴을 들면 보이겠지.”

피부가 거칠어졌네. 좀 쉬면서 오지 그랬어, 바보야.”

텅 빈 세계에서 혼자 울고 있을 사람이 있어서.”

 

그래서 유중혁은 달려야만 했다. 여름은, 낮이 기니까. 여름이 지나 해가 짧아지는 시기가 돌아오기 전에 그를 찾아야만 했다. 해가 길어질수록 찾아오는 외로움에 김독자는 슬퍼할 것이 분명했기에. 그리고 그 전에 김독자를 찾아 품에 안았다. 그것만으로도 유중혁은 행복했다.

 

 

***

 

 

중혁아, 그거 알아?”

?”

어제 마트에서 발견한 보조 배터리로 핸드폰 충전했잖아.”

아아, 굳이 할 필요가 있었나 싶긴 했다만.”

여튼 내가 뭘 봤는지 알아?”

또 쓸데없는 소설을 읽었겠지.”

그러지 마라. 그것 때문에 너와 만난 거니까.”

 

기분이 상했는지 부푼 볼을 꾸욱 누르자 바람이 나왔다. 귀여웠다. 좀 더 놀릴까 싶었지만, 째려보는 눈빛에 그만두었다.

 

그래서 무엇을 발견했지?”

네가 나를 찾아온 날 말이야.”

, 그걸 세고 있었나?”

역시 네 생일이더라. 선물 미리 준비해둘걸.”

 

네가 그렇게 빨리 찾아올 줄은 몰랐단 말야. 투덜거리는 모습을 보며 미소가 절로 그려졌다. 김독자는 모르겠지만 자신에게 선물은 필요 없었다. 애초에 제 생에 가장 큰 선물은.

 

이미 받았으니 괜찮다.”

?”

충분히 받고도 넘치니까. 그러니까 괜찮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