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편 : https://53450n-jhdj.tistory.com/25?category=334180

 

 

초등학교에 들어가는 지금보다도 더 어렸을 적, ‘한여름 밤의 꿈이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다. 말 그대로 밤사이에 일어났던 모든 일이 꿈이었단 내용으로 기억한다. 자신에게도 그런 일은 있었다. 그 날의 경험은 마치 한여름의 꿈같았다.

 

***

 

엄마가 동생을 가졌다는 말에 친척들이 선물을 보내왔다. 그것을 보고 자신도 무언가를 선물하겠다는 생각으로 집을 나선 날이 녀석을 만난 날이었다. 모아둔 용돈을 가지고 상점가로 가던 중 작게 우는 소리가 들렸다.

 

, .”

 

주위를 둘러보다 발견한 것은 미끄럼틀 아래에 몸을 구겨 앉은 자신보다 어려 보이는 아이였다.

 

알겠지, 중혁아? 넌 이제 오빠나 형이 될 거야. 동생이 울면 왜 울고 있어?’ 하고 한 번은 물어봐 주렴. 대답해 준다면 들어주고, 대답하지 않는다면 옆에 있어 주렴. 사람은 온기에 약한 생물이라, 누군가가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크게 위안을 받거든.’

 

왜 울고 있지?”

히끅!”

 

엄마가 했던 말을 떠올리곤 친절하게 물었건만 돌아오는 것은 놀란 얼굴과 딸꾹질이었다.

 

히끅!”

 

그것도 두 번이나.

 

다쳤군. 상처 빨리 치료하는 게 좋을 거다.”

루시퍼?”

 

루시퍼라면 아버지의 서재에 있는 도록에서 봤었다. 천사가 부정한 짓을 저질러 타락한 존재라는 설명을 떠올리자 자연스레 미간이 구겨지고 목소리가 험하게 나갔다.

 

누굴 타락 천사 취급하는 거냐.”

 

그 말 한마디에 팔을 들어 머리를 보호하는 그 모습을 보고 단지 얼굴을 찌푸린 것도 다른 사람에겐 협박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무래도 이 작고 약한 녀석은 누군가에게 지속적으로 폭력을 당한 거겠지.

 

, 이름이 뭐냐.”

, 김독자. 8살이야.”

동갑이군. 난 유중혁이다. 그리고 난 너를 때리지 않는다.”

 

그 말에 녀석의 얼굴이 붉어졌다.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매우 창피해한다는 건 알 수 있겠다.

 

걱정하지 마라. 네가 여기에 있다고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을 테니까.”

 

우리 중혁이, 무슨 일 생기면 꼭 경찰에 연락하기야?’

어째서요? 경찰들이 무능하다고 항상 얘기하셨잖아요.’

, 하지만 언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까. 엄마랑 아빠가 우리 중혁이를 도울 수 없는 곳에 있을 땐 그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도 나쁘진 않을 거야. 어떤 사람도 도움을 바라는 사람을 매몰차게 내치는 일은 거의 없으니까.’

 

……그리고 가능하다면, 경찰에 도움을 요청해라. 아무런 쓸모가 없을지라도 도움을 바라는 이를 매몰차게 내치는 일은 거의 없을 거다.”

 

자신에게 과연 그런 날이 올까 의문이긴 하지만, 존경하는 어머니의 말씀이니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도와줘…….”

미안하지만 나는 너와 비슷한 나이라 도울 수 있는 것이 없다.”

.”

 

다시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저와 같은 나이인데도 더 말랐고, 더 작고 연약해 보였다. 마치 곧 태어날 동생이라고 부모님이 보여주셨던 사진 속의 아기처럼. 그래서 고민하다 말을 꺼냈다. 부모님께 들었던 작고 약한 동생을 도와주렴.’이라는 그 말에서 작고 약한에 속하니 도와주는 것이 맞는 일이리라.

 

하지만 내 부모님은 알고 있는 것이 있을 수 있다. 그러니 물어보지. 그 전에 물어볼 것이 있는데.”

, 뭔데?”

널 때린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야 도울 수 있다.”

 

주저하는 그 모습에서 자신만으론 부족하다는 걸 깨달았다. 자신이었어도 동년배의 아이가 폭력에 관한 것을 돕겠다고 하면 당장 지능을 의심할 테니 당연한 일이다. 게다가 손을 살짝 들어 올렸다고 바로 머리를 방어한다는 건 폭력이 오랫동안 이루어졌다는 증거라고 들었다.

 

걱정하지 마라. 아버지 친구 중에서 변호사분이 계신다. 그분이 종종 집에 오시기 때문에 같은 학교 학생 이야기라고 하면서 슬쩍 물어볼 생각이다.”

하지만 피해가 갈 텐데…….”

내가 아는 것은 네 이름과 나이, 외형뿐이지. 네가 어디에 사는지도, 어디서 무엇을 하며 노는지도 모른다. 우린 그저 이 놀이터에서 만난 것뿐이니 네게도, 내게도 피해가 있을 일은 없다.”

 

그 말에 주저하더니 더듬더듬 말을 시작했다. 술을 마시고 폭력을 휘두르는 부친의 존재에 대해 말하면서 훌쩍이는 모습에 저도 모르게 등을 조심스레 토닥였다. 울어본 적은 아주 아기 때를 제외하곤 없었지만 옆집 녀석은 자주 울었고, 그때마다 그 집에 사는 사람들이 녀석을 안아 들어 등을 토닥였다. 다행히 방법이 맞는지 울음소리가 줄어들었고, 이내 훌쩍이더니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고마워.”

무엇이?”

내가 말한 게 이상한 거 알아. 조각 글을 쓰듯이 이것저것 짧게 말하고, 순서도 맞지 않는데 아무런 불평도, 불만도 하지 않고 끝까지 들어줬잖아. 전에 다른 애들이 내가 얘기하는 거 듣더니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이 행동했었거든.”

그건 이미 사람으로서 그른 놈이다. 사람이라면 누가 어떤 말을 하던 어느 정도 듣는 태도는 취해야 하는 것이 일반적인 상식이니까.”

, 어린애 아닌 것 같아.”

피차일반이다. 내 또래 중에 조각 글이 짧은 글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아는 녀석은 거의 없다. 그 외에도 이것저것 어려운 단어들도 잘 알고 있더군.”

엄마가, 나한테 도움이 되니까 이것저것 읽으라고 했었어. 그래서 이렇게 많이 아는 거야.”

 

같은 반의 녀석들은 자신이 말하는 것의 절반이나 알아들으면 다행인 수준이었는데, 어머니의 교육이었군.

 

좋은 어머니군.”

 

아버지란 작자가 아이만 때리지는 않는단다. 보통 자기 배우자도 같이 때리지. 둘이 같이 작정하고 애를 때리는 경우도 있지만, 그 경우는 보통 적어. 썩을 것들, 그럴 거면 낳지를 말던가. 자기들이 서로 좋아 죽어서 가진 애한테 무슨 짓이래.’

 

아버지의 친구였던 변호사가 어느 날 아버지와 술을 마시다 사건에 대해 물은 자신에게 했던 말이었다. 자기 어머니에 대해선 볼을 붉히면서 기뻐하는 걸 보니 아버지만 폭력을 일삼는 모양이군.

 

그치? 엄마 엄청 대단해! 어려운 말도 금방 해석해서 말해주고, 외국의 말도 잘 알아! 책만 보고도 요리를 엄청 맛있게 만들어!”

 

녀석에게 제 엄마는 모르는 게 없는 만물박사였으며, 책만 보고도 맛있는 요리를 만들어내는 뛰어난 요리사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녀석을 지키고 기르는 것에 열과 성을 다했다. 모르는 것은 옆에서 같이 책을 읽어주며 가르쳤고, 빈약한 식사라도 끼니에 맞춰 먹이려 애썼다는 걸 녀석의 말을 들으며 알 수 있었다.

 

, 미안. 내가 너무 논점에서 빗나갔지…….”

아니, 괜찮다. 네가 얼마나 네 어머니를 좋아하는지 알 수 있었으니까. 이제 5시가 되니 오늘은 이만 헤어지고 내일 만나지.”

내일?”

그래. 내일은 토요일이지 않나. 게다가 이제 곧 저녁 시간이다. 늦으면 네 어머니도 걱정하고 계실 거다.”

그럼 내일 몇 시에 만날까?”

아버지 친구분이 오늘 오신다고 했으니 내일은 오후 2시쯤이 좋겠군. 오늘처럼 여기서 보지.”

 

시간이 늦었으니 이만 가보겠다 말하고 아버지 친구분이 몇 시에 오실지, 녀석을 도울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이 뭔지 생각하며 몇 발짝을 걸었을까. 갑작스러운 붙잡힘에 걸음을 멈추고 돌아봤다.

 

왜 그러지?”

, 아니, 저기, 그러니까.”

 

당황한 어조, 놀란 얼굴. 아마 자신 같은 사람이 많았으리라 생각하고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걱정하지 마라. 내일 조금 늦을 수는 있지만, 너와 약속한 것을 잊을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다.”

고마워.”

그 말은 네 일이 해결되면 듣기로 하지.”

 

동생이 생긴다면 저런 녀석일까. 여자일지 남자일지도 잘 모르겠지만, 녀석처럼 자신에게 기대온다면 기쁠 것 같다.

 

아들, 다시 말해볼래?”

오늘 만난 녀석이 가정폭력을 당하고 있습니다. 부친이 때리고 모친이 지키는 것 같더군요. 녀석을 도와주고 싶습니다.”

중혁아, 친구를 도와주려는 생각은 기특해. 그리고 너 혼자서 나서는 게 아니라 주위 어른에게 도움을 청하는 점은 엄마는 칭찬해주고 싶어. 하지만 요새 이 주변에서 네 또래 아이들의 납치가 많이 늘었대. 그 아이가 널 납치하려는 미끼라면? 나는 널 잃을까 무섭단다.”

 

걱정스러운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어머니를 보다가 아버지를 바라보자, 아버지는 씩 웃으셨다.

 

그럼 내일 몰래 따라가면 되지. 핸드폰에 112 찍고서 따라갔다가 위험하면 신고하고, 아니면 순수하게 도와주면 되는 건 어떨까, 여보?”

그러다 당신이나 중혁이가 위험해지면요? 그건 싫어요.”

걱정하지 마. 난 연락 담당이니까. 중혁이가 위험에 처하면 몸빵을 설 녀석은 여기 있지!”

장난하냐?”

 

때맞춰 들어오던 아버지 친구의 미간이 구겨진 종이뭉치처럼 찌그러졌다.

 

뭐야, 그런 거였어? 잘 생각했구나. 잠시만 기다리렴. , 네 컴퓨터랑 프린트 빌린다.”

언젠 안 빌렸다고. 아들이 부탁한 거니까 팍팍 써도 괜찮아.”

그럼 법전 1권을 통째로 복사를…….”

, 그 정도 종이는 없어!”

, . 우선 들어가서 얘기할래요? 중혁이도 있는데 부끄럽지도 않아요?”

크흠.”

그럼 제수씨, 이따가 뵙죠.”

 

말로 두 성인 남성을 내쫓은 어머니는 이내 자신을 돌아보며 웃으셨다.

 

우리 중혁이가 만났다는 그 애, 엄마한테 얘기해줄 수 있을까? 엄마가 듣고 싶어서 그래.”

이름은 김독자라고 했고, 저와 같은 나이였습니다.”

 

책을 좋아했고, 그 이상으로 제 어머니를 좋아한 녀석이었다. 그리고 제 친부에게 학대당했다.

 

녀석의 아버지 쪽이 폭력을 휘둘렀고, 꽤 오랫동안 당한 것 같더군요. 저를 보고 루시퍼라고 하기에 욱해서 목소리가 조금 거칠게 나갔는데, 머리부터 감싸 안았습니다.”

아들은 루시퍼가 싫어?”

타락의 증거잖습니까.”

하지만 미()의 증거잖아? 아마 그 아이는 자기가 여태껏 본 사람 중에서 네가 가장 잘생겼으니까 그런 말이 절로 나왔을 거야.”

 

머리를 쓰다듬으시며 하시는 말씀에 정말 그런가, 싶기도 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 맹한 얼굴을 떠올릴수록 그게 맞는 것 같다. 헤어지기 전, 자신을 붙들었을 때 뭔가에 홀린 듯한 얼굴이었던 걸 봐선 어머니 말씀이 맞는 것 같기도 하다.

 

우리 중혁이, 인기 많구나? 오늘 처음 만난 사이에 그런 말을 다 하긴 쉽지 않은데 말이야.”

어머니가 잘 낳아주신 덕분입니다.”

어머, 아깐 엄마라고 했으면서. 그래도 아들한테 그런 말 들으니까 기분은 좋네. 누가 알려줬니? 네 아빠?”

 

깔깔 웃으시는 소리에 아버지가 서재 문을 열고 나왔다. 그 사이에 뭘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머리가 까치집이다.

 

여보, 나 불렀어? 뭐야? 둘이 무슨 얘기를 했길래 그렇게 즐겁게 웃어?”

우리 아들한테 당신이 가르친 거 들었어요.”

가르친 게 많아서 뭔지 바로 안 떠오르는데. 뭐지? 동생이 태어나면 무조건 도와주지는 말고 도움을 요청한 뒤에 도와줘라? 언제 어느 때든 무슨 일이 일어날 수 있으니 그에 따른 대비법 306가지? 믿어야 할 사람과 믿으면 안 되는 사람 구별법?”

중혁아, 잠깐 이리로 와봐라. 네가 부탁한 거 알려줄게.”

 

상냥한 얼굴을 한 어머니가 아버지를 향해 방긋 웃었다. 그러나 아버지와 자신은 알았다. 가끔 자신과 아버지가 무언가를 잘못했을 때, 어머니는 저렇게 웃고서 아버지나 자신을 아무런 말 없이 그저 웃으며 봤다. 자기 잘못을 말할 때까지 멈추지 않아 아버지가 진실을 말하게 하는 미소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말한 적도 있었다. 바로 들켜서 무릎 꿇고 머리 위로 손을 올렸지만.

 

.”

 

어쨌든, 지금 이 자리에서 도망칠 수 있다는 거다.

 

일단 네게 몇 가지 더 물을 게 있단다. 그 애가 말한 걸 기억해서 아저씨한테 알려주면 돼.”

.”

그 애 아빠가 아이와 자기 아내를 때린다고 했지?”

.”

혹시 일기 같은 것 쓴다고 하니?”

?”

 

확실하게 격리하기 위해선 주변의 증언도 필요하지만, 증언보다도 증거도 필요하다. 폭력의 흔적, 글이나 음성으로 남긴 기록, 며칠에 무슨 일이 있었고, 어떤 날씨였나. 그 외에 기타 등등.

 

녹음이나 기록할 때 꼭 들어갈 항목들과 내 명함, 재판 절차도 간략하게 써서 주마. 대신에 아저씨랑 약속 하나만 해줄래?”

뭔가요?”

중혁이가 그러지 않을 거라는 건 아저씨도 잘 알고 있지만, 혹시 모르니까. 그 아이가 괴롭힘을 당하게 되면 지켜줄래?”

아버지께서 본인 몸은 본인이 지키는 거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덤벼오는 동네 녀석들을 하나같이 울려서 내쫓았다. 떼로 덤벼서 위험한 때도 있었지만 전부 제 발밑에 무릎을 꿇렸고, 울려서 승리를 쟁취했다. 어머니께선 그저 영웅 놀이, 그 정도로 알고 계신 것 같지만.

 

아오, 그 녀석 진짜……. 아저씨가 말하는 건 정신적으로 괴롭힘을 당하는 거야.”

왕따, 말인가요?”

그래. 부모 중 어느 한쪽이 없다고 하면 그걸 빌미로 괴롭히는 썩, 아니지, 못난 녀석들이 있어. 그런 녀석들이 있을 때, 그 아이가 스스로의 힘으로 일어설 수 있을 때까지만이라도 부탁한다. 아마 이혼을 하게 되면 남편이 나중에 찾아올 수 있으니, 이사를 가게 될 거야. 그러니 기간은 길지 않을 거야.”

 

녀석의 안전을 위해 이사를 하는 것은 이해했지만, 스스로 설 때까지 녀석을 도와야 한다는 것은 이해하지 못하겠다.

 

어째서입니까? 아버지는 지금부터 스스로 서는 연습을 해야 나중에 힘든 일이 있을 때 지금의 경험을 토대로 설 수 있다고 하셨는데요.”

사람은 생각보다 연약한 생물이야, 중혁아. 스스로 서지 못할 정도로 마음이 약해졌을 때 공격을 당하면 다신 기회를 얻지 못할지도 몰라.”

 

쓰게 웃으며 울 것 같은 얼굴을 한 아저씨의 부탁에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아저씨가 부탁하지 않았더라도 자신은 김독자를 지킬 생각이었다. 헤어질 때 봤던 그 얼굴은, 나중에 무슨 일이 생기면 홀연히 없어져선 정리하고 왔다며 슬프게 웃을 것 같았다.

 

아버지, 시간이 다 되어 가는데요.”

잠깐만 기다려라, 중혁아. 이것까지만 넣자.”

이미 주머니가 가득 찼어요.”

 

손바닥과 비슷한 크기의 녹음기는 바지 주머니에 어떻게 욱여넣었지만, 겉으로 보기엔 티가 나서 결국 윗옷도 넉넉한 티셔츠로 갈아입었건만, 뭘 또 넣으라는 걸까.

 

이건 수신기야. 아빠가 신호를 보내면 진동이 울릴 거야. 이렇게.”

 

징징 울리는 것을 바라보다 아버지를 쳐다보자 손에 쥐여주신다.

 

두 번 울리면 녹음기를 키는 거고, 한 번 울리면 끄는 거야. 알았지?”

.”

네 친구를 의심하는 것도, 네 친구의 뒤를 캐는 것도 아빠도, 엄마도 하기 싫지만 우리는 널 잃어버릴 수 없어, 중혁아. 그러니 이번만 우리 고집을 들어주렴.”

. 그럴게요.”

 

네가 태어나기 전에 한 번 유산을 한 탓에, 너나 네 주변에 무슨 일이 생기면 언니나 형부가 좀 극성으로 반응할 수 있어. 한 번 잃었으니 두 번이라고 못 잃을까. 둘은 너까지 잘못되면 살 수 없어서 그렇게 반응하는 거야. 그러니 가끔 부담스러우면, 이모한테 찾아와. 네 숨통이 트일만한 걸 알려줄게.’

 

얼마 전, 둘째 임신 축하 선물을 주고 간 이모가 했던 말이 떠올라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도 무언가를 잃어버려서 다시 잃어버리지 않게 주의한 경험이 있었으니까. 그러나 그건 그거고 현 시간은 놀이터에 도착하면 조금 늦을 시간이다.

 

아버지.”

? 왜 그러니, 중혁아?”

놀이터에 도착하면 늦을 것 같은데요.”

 

아버지의 차에 타고 빠르게 놀이터에 도착했지만 그래도 늦은 것은 늦은 것. 놀이터를 둘러보다가 그네에 앉아서 우울한 얼굴로 바닥만 바라보는 김독자를 찾았다. 아마 자신이 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지, 어제보다 더 우울한 얼굴이다.

 

늦어서 미안하군.”

히익!”

그렇게 놀랄 것 없다. 혹시 몰라 종이에 방법을 적어달라고 했는데 순서가 흐트러져서 다시 정리하느라 조금 늦었을 뿐이니.”

 

놀란 얼굴을 하더니 이내 자신을 미끄럼틀 아래로 이끈다. 어제도 그렇고 오늘도 그렇고, 얼굴이 하얀 걸 보니 햇빛을 받기 싫어하는 건가. 아니면 어디 아픈 건가. 이유 모를 감정이 불쑥 치고 올라와 저도 모르게 질문했다.

 

왜 그러지?”

이제 봄이지만 아직 햇볕이 따갑잖아.”

지금은 여름이 아니다만.”

그래도. 여긴 시원해.”

 

그 말에 못 이기는 척 녀석의 손에 붙잡혀 미끄럼틀 아래로 향했다. 녀석이 제 아버지와 헤어질 경우, 잘하면 같은 동네에서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봉투를 내밀었다. 하나 하나 이해하기엔 아직 어렵지만, 녀석이 그대로 외워서 자기 어머니에게 알린다면 큰 도움이 되리라.

 

김독자.”

. ?”

하나 물어볼 것이 있다.”

뭔데?”

 

한 장, 두 장 넘기는 녀석을 빤히 바라봤다. 이해해보려 했지만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 심통이 났는지 볼에 바람이 들어가 빵빵했다. 한 번 꾹 찔러보고 싶은 마음을 가라앉히고 주머니에 손을 넣자 손에 닿는 물체가 짧게 두 번 울린다. 진짜 납치범이라면 위험하고 아니라면 아이를 도울 사전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미리 받았던 녹음기와 수신기였다. 혹시라도 들릴까 조심하면서 버튼을 누르고 녀석에게 물었다.

 

넌 어디에 사는 거지?”

, 그게.”

이 주변의 동네는 대부분 서로서로 알고 지내는 사이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누군가를 때린다면 주위에서 알 수 있을 정도지. 심지어 전날 누가 어떤 음식을 먹고 간식으로 무엇을 샀는지 반나절도 안 돼서 소문이 나는 동네다.”

저기, 아래쪽에 살아.”

아래쪽?”

아파트 뒤쪽으로 내려가면 있는 작은 집들.”

. 미안하다. 요새 위험한 소문이 돈다며 어머니가 나오기 전에 붙잡으면서 얘기하셔서 나도 모르게 경계한 모양이다.”

위험한 소문?”

아동납치가 성행한다고 하더군. 미끼로 목표 대상과 비슷한 나이의 아이를 접근시킨 후, 방심한 사이에 납치한다고 한다.”

그거 엄청 무서운 소문이다.”

 

조금의 주저 없이 나오는 대답과 반응은 녀석이 뭘 꾸미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게 만들었다. 아동납치 소문을 듣고 살짝 파래진 안색도 신빙성을 더해주었다. 때마침 확인되었다는 신호가 진동이 울려 수신기를 그대로 껐다. 더 이상 이 녀석과 대화하는데 누군가가 끼는 느낌을 받기는 싫다는, 그런 어린 생각에서 나온 행동이지만 자신의 감은 엇나간 적이 없으니 괜찮다.

 

항상 경계하는 수밖에 없겠지. 그보다, 그 종이 안엔 핸드폰 번호가 적혀 있을 거다.”

핸드폰 번호?”

그래. 그 안에 아버지 친구분의 핸드폰 번호와 성함을 적어두었다. 종이에 적힌 대로 하다가 막히는 일이 발생하면 주저 없이 전화해 도움을 청하라고 하셨다.”

정말 고마워.”

네가 아직 그 남자의 손에서 벗어난 것이 아니니 감사 인사는 나중에 듣겠다.”

 

그러니 나중에 고맙다고 제대로 말하라고 덧붙였더니 웃음이 터뜨렸다. 첫날 마주했던 겁먹은 눈동자나 행동보단 낫지만, 저 버릇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만난 것은 일수로 따지면 단 이틀밖에 안 되건만 녀석은 너무 쉽게 읽히고 있었다. 자신도 남에게 뭐라고 할 정도는 아니지만 김독자 저 녀석은 너무 심했다.

 

또 그러는군.”

?”

혼자 생각하고 혼자 결론을 내리고 혼자 납득하지. 넌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을 필요가 있다.”

그건 너도 똑같은 것 같은데.”

 

지금 누가 누구에게 그런 말을 하는 건지. 어이없다는 생각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났는지 신나게 웃는다. 그것이 마음에 안 들어 볼이라도 꼬집어 주겠다는 생각으로 손을 뻗자 이리저리 얼굴을 돌리며 피한다.

 

이리 와라, 김독자.”

에에- 싫어- 꼬집을 거잖아-.”

안 할 테니 이리 와라.”

아하하하!”

웃지 마라, 김독자.”

하지만 웃기잖아, 중혁아.”

 

정말 즐겁다는 듯, 활짝 웃는 얼굴은 이틀간 봐온 얼굴 중에서 가장 나아서, 한숨을 내쉬고 녀석의 옆에 앉았다. 기다렸다는 듯 재잘재잘 얘기하는 내용은 일상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이야기와 자신이 읽은 책의 이야기. 그에 맞춰 자신도 얘기를 풀어놓다가 문득 어제 들었던 이야기가 기억났다. 같은 동네에서 살 수 있다는 희망은 박살 났지만, 편지는 주고받을 수 있지 않나.

 

그 안에 적힌 대로 잘 된다면 넌 이사를 할지도 모르겠군.”

, ? 그냥 남으면 안 되나?”

지금 사는 집에 계속 살게 될 경우 네 아빠라는 작자가 다시 찾아올 위험이 있다고 했다. 그러니 안전을 위해서 이사를 하는 편이 좋을 거다.”

그럼 다시는 못 만나는 거야?”

 

방금 전까지만 해도 웃음이 가득했던 얼굴에 눈물이 조금씩 차오른다. 또래 애들을 울렸던 적은 많음에도 불구하고, 녀석이 울기 시작하니까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허둥대다가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아예 못 만나게 되는 건 아니라고.

 

서로 사는 곳을 알면 편지 정도는 보낼 수 있다. 그 안에 내가 사는 집의 주소도 있다. 그러니 걱정하지 마라.”

 

그러나 우는 것을 멈출 거라는 생각과 반대로 더 우는 녀석에 당황해 손을 뻗어 녀석의 눈가를 문질렀다. 아버지가 어머니께 종종 이러했으니 이상한 행동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생각과는 달리 녀석은 더 울었다. 오늘 헤어지면 다시는 못 만난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처럼.

 

울지 마라.”

, 그치만. 만약에 연락이 안 되면 어떻게 해?”

그럼 나중에 커서 만나면 되겠지. 그땐 네가 먼저 다가와라. 이번엔 내가 먼저 널 찾았으니.”

. 다음번엔 꼭 내가 먼저 찾아갈게!”

 

그러나 녀석을 다시 만날 날은 오지 않았다. 가족여행을 가자는 이야기가 나왔는데 거기서 어린 자신만 빠질 수는 없었다. 길어야 일주일이라고 해서 안심했건만, 녀석에게 편지가 온 당일에 크게 앓았기 때문이었다. 어떻게든 가겠다고 발버둥을 쳐봤건만 돌아오는 건 눈물 어린 어머니의 얼굴과 걱정스러운 아버지의 얼굴이라, 결국 나가지 못한 채 그대로 약을 먹고 잠들었다.

 

중혁아, 잘 들어. 내 친구, 그러니까 네 아버지가…….”

 

동생이 태어나고 얼마 안 되어서, 안 좋은 일이 겹치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의사가 경고했던 대로 동생을 낳다가 죽었으며, 아버지는 그 뒤로 5년을 채 채우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아내랑 같이 묻어줘. 우리 애들이 다 클 때까지 네가 후견자가 되어주고.’

 

아버지가 친구분께 남긴 유언은 그게 다였다. 우리에게 하신 유언은, 그저 너희가 외로울 때, 우리가 꿈에 찾아갈게.’라는 종이가 전부였다.

 

오빠.”

잠시만 기다려라. 밥은 금방 다 되니까 그동안 숙제를 해라.”

.”

 

아저씨는 정말로 후견인의 역할을 다했다. 부모님의 재산을 빼돌려 독식하거나 후견인의 입장을 내세워 핍박하거나 협박하지도 않았으며, 본인의 일이 바쁨에도 우리에게 신경을 쓰려고 노력했다.

 

오빠아…….”

 

그러나 그런 그도 죽고 말았다. 사인은 아나필락시스 쇼크로, 의료계에서 일하던 이가 아저씨가 반대 측의 변호를 한 탓에 자신이 졌다며 고의로 벌을 잡아다 사무실에 집어넣었다고 한다. 친척들은 이미 일이나 그 외의 사정으로 인해 타국으로 떠난 지 오래였고, 그도 아니면 사망했다. 정말로, 단둘이 남았다.

 

걱정하지 마라. 내가 지켜줄 테니.”

.”

 

다행히 배워둔 것은 많았고, 그만큼 할 수 있는 것도 많았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가장 적성에 맞는 것이 프로게이머였다.

 

유중혁 군, 앞으로 잘 부탁하네.”

잘 부탁드립니다.”

 

그러나 그런 일상도 얼마 안 되어 무너졌다. ‘유료화가 시작되더니 [시나리오]가 나타났다. 싸움과 잠깐의 휴식, 그리고 다시 시작되는 싸움. 사람들과 싸울 때도 있었으며, 사람이 아닌 것과 싸울 때도 있었다. 스승이 생겼고, 동료가 있었다. 그리고 죽을 때마다 유료화가 시작된 그 순간으로 돌아왔다. 그 모든 것을 거치면서 어릴 적의 기억은 점점 흐려졌다. 일상에서 동생을 제외하고 남은 기억은 특이한 이름을 가진 녀석에 대한 것뿐. ‘한여름 밤의 꿈이라는 소설과 비슷하게 신기루와도 같던, 그 희미해진 기억 뿐.

 

김남운이 아니군.”

 

지난 회차들과 다르게 김남운이 아닌 다른 사람이 살아남았다. 여태 이런 적이 있었나 생각을 해보아도, 동료라고 부를법한 이들은 바뀐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늦게 합류하거나 조금 일찍 합류하거나의 차이일 뿐, 결국 그들은 살아있는 존재였으니까. 그러나 김남운은 죽었고, 원인은 저 녀석이었다.

 

이름 뭐냐고.”

김독자다.”

이상한 이름이군.”

그런 말을 많이 듣는 편이지.”

 

거듭된 회귀와 싸움으로 이젠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어렸을 적 도움을 줬던 녀석의 이름도 김독자였다. 이름이 특이해 그것만 기억하고 나머지는 잊어버렸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녀석과 부딪히면서 저 녀석은 그때의 김독자가 아니라는 생각에 확신이 들었다. 녀석과 알고 지낸 지는 얼마 안 되었었지만, 적어도 그 녀석은 죽을 자리인 걸 알면서 스스로 걸어 들어가진 않았고, 스스로 희생을 하겠다며 나서지도 않았다.

 

김독자!”

 

또다. 사람 뒤통수를 치는 것도 한두 번이어야지 이게 대체 몇 번째인가. 그놈의 몸뚱아리엔 죽을 자리를 찾아가는 유전자라도 각인이라도 되어있는 건지, 왜 그렇게 죽지 못해 안달인 건가. 그러나 이렇게 욕을 하고 녀석을 찾으면 죽여 버리겠다고 칼을 휘둘러도, 정작 자신은 그를 죽이지 못한다. 나는 너에게서 내 과거의 한 자락을 맛보았다.

 

유중혁, 바보……. 왜 안 와…….’

 

이젠 기억도 제대로 나지 않는 그 어릴 적, 녀석과의 마지막 만남은 자신이 아파서 집에서 나가지 못하면서 끝났다. 이름도, 가끔 보이는 데자뷔 같은 얼굴도 전부 이 녀석이 그 녀석이라서라면.

 

그만 이 손 놓고 꺼져. 이 빌어먹을 새끼야.”

 

그 어떤 상황에서도 나는 네가 죽지 않을 것이라 믿는 수밖엔 없었다. 너는 내게 과거의 인연이었고, 현재를 나아가게 해주는 인연이다. 이제는 어렸을 때에 관한 일은 기억도 거의 나지 않고, 그때의 물건을 가지고 있는 것도 없지만, 단 하나만은 기억이 났다.

 

그 날, 나가지 못해 미안했다. 김독자.”

 

네가 이사를 간다고, 마지막으로 만나자고 편지를 보냈던 날, 그 때에 대해 사과를 한다고 해서 네게서 대답이 돌아올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이 세계에는 수많은 패러랠이 있고, 네가 없는 세계도 있을 것이다. 과거 회차와 지금이 다른 이유가 그것이겠지. 그러나 너는 내게 대답했다.

 

너무 늦었잖아, 중혁아.’

 

그것은 너 또한 과거에 나를 만났다는 증명이고, 내 어렸을 적의 일이 금방 사라지는 꿈같은 것이 아니라 실재(實在)함을 알리는 것이니. 그에 대한 감사로 녀석이 돌아오면 인사부터 할까.

 

오랜만이다.’

 

라고.

 

녀석은 어떻게 반응할까. 녀석이 살아서 돌아올 거라 믿으며, 그 반응을 상상해 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다. 그리고 인사를 하기 전에, 한 대 때리는 것을 잊지 않으리라. 대체 뭘 어떻게 하면 목숨을 그렇게 종이처럼 내던지느냐고.

덴버 - 한낮의 꿈 :: 2019. 8. 15. 01:18 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