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IGGER WARNING

이하 내용에는 학교폭력, 욕설, 자살, 인격모독 등이 해당되어 있습니다. 글쓴이는 이것을 옹호하지 않으며 현실에서 일어나서는 안 될 일임을 명백히 구분하고 있음을 밝힙니다.

 

 

7월의 막바지. 방학이 찾아온 성류고등학교의 운동장은 고요하기만 하다. 학기 중이었더라면 축구라던가 농구를 하려는 아이들로 인산인해를 이뤘겠으나 방학이 되어서도 굳이 학교에 찾아오는 애들은 없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그렇다고 그런 풍경이 나쁘다는 것은 아니고 상황이 그렇다는 이야기일 뿐이지만. 무더운 땡볕 아래, 개미 새끼 한 마리도 보이지 않는 운동장을 내려다보며 김독자는 방백했다.

 

방학의 가장 큰 장점이라고 하면 뭐니 뭐니 해도 학교에 나가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고. 뒤집어 말하면 학교에 오더라도 누군가를 마주치게 될 일도 없다는 말이 된다. 평소 자신을 괴롭히는 송민우 패거리도 오지 않으니 학기 중과 같이 시비에 걸릴 일도 없고. 학교를 관리하는 선생님들의 수도 적어 옥상에 몰래 들어오는 것을 들킬 일도 없다. 따라서 이렇게 옥상 난간에 걸터앉아 자살을 꾀하더라도, 그것을 말릴 사람조차 오지 않는.

 

죽기에는 딱 알맞은 날이지.”

 

실로 어울리는 말이 아닐 수 없으리라.

 

앉아있던 몸을 일으켜 세운 김독자는 희미한 미소를 그렸다. 이어 아무것도 없는 허공으로 육신을 내던졌다. 여름치고는 서늘한 바람이 얇은 머리카락을 간질이며 이름을 속삭이는 듯하다. 김독자! 바람 소리치고는 조금 굵은 것도 같지만 아무렴 어때. 그 소리가 어쩐지 익숙하다는 생각을 애써 지우며 눈을 감았다. 새카맣게 물든 시야에 희끄무레한 빛이 스며든다. 머지않아 다가올 충격에 대비하지 않은 채 김독자는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그러므로 소년은 오늘을 살아간다.

Written by. 로폴라

 

 

 

그의 계획은 정말 완벽했다. 대체로 학교들이 그러하듯 그가 다니는 학교는 높이가 5층 이상이었고 옥상에는 사람도 없었다. 6층 이상의 건물 높이에서 추락했으니 김독자는 틀림없이 즉사했을 터였다. 그래. 뛰어내려 정말로 추락했다면 말이지. 불행하게도 그 완벽에 가까운 계획은 우연히 옥상을 찾아온 사람에게 발각되는 것으로 허무하게 막을 내렸다. 그리고 그 사람이 뻗은 커다란 손에 의해 옥상 안으로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결과적으로 김독자는 죽지 않았다. 정확히는 죽지 못했다.

 

시야 한가득 담긴 푸른 하늘을 멍하니 응시했다.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김독자는 자신에게 일어난 상황을 받아들이기 위해 부단히도 애를 썼다. 그러나 장시간 땡볕 아래 있던 탓인지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손을 들어 올려 이마를 짚자 뜨끈하게 오른 체온이 느껴진다. 열사병에 걸리기라도 한 건지. 한심하기 짝이 없는 상태에 허탈한 웃음이 입술을 비집고 튀어나왔다. 김독자가 정신을 차린 것은 그로부터 꽤 시간이 흐른 후였다.

 

어느 정도 상황 파악이 끝나자 이번에는 머리끝까지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어떤 빌어먹을 놈이야. 원치 않은 삶을 강제적으로 연명하게 된 김독자는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으득. 해소되지 않은 화로 이가 갈렸다. 어떤 거지 같은 자식인지 얼굴이나 한번 보자. 노기로 번뜩이는 눈을 하며 잘 움직이지도 않는 고개를 들었다가 곧바로 자신의 행동을 후회했다. 시발. 네가 왜 여기 있어? 창백하게 질린 낯이 된 김독자는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김독자를 살린 빌어먹을 놈. 그러니까 김독자 입장에서는 빌어먹을 놈에 해당하는 유중혁의 말에 따르면 학교에 있던 것은 지극히 우연이었는데. 녀석은 도서관에 찾을 책이 있어서 학교에 왔다가. 우연히 학교에 있던 선생님의 부탁을 받아 교무실에 갔으며. 심부름이 끝나고 우연히 고개를 돌렸는데. 또 우연히 옥상 키가 없는 것을 봤고. 돌아가기 전에 잠깐 옥상에 들렀는데. 하필이면 그 타이밍에 김독자가 몸을 내던지고 있었으며. 그걸 확인한 유중혁은 당연하게도 그를 살리기 위해 손을 뻗었고 아슬하게 붙잡을 수 있었다고 한다.

 

이야기를 끝까지 들은 김독자는 생각했다. 지금 그걸 나보고 믿으라고? 녀석이 말한 상황은 신의 농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소설로 치면 삼류 소설에도 나오지 않을 클리셰적인 상황. 그걸 아무렇지도 않게 단순한 우연으로 치부하는 유중혁의 태도는 자신이 말을 잃게 만들기엔 충분했다. 그래, 어쩐지 일이 잘 풀리더라니. 자신이 태어난 이래로 일이 잘 풀린 날은 단 하루도 없었음을 떠올린 김독자는 그대로 옥상 바닥에 주저앉았다.

 

하하!”

 

그리고 오늘은 그중에서도 가장 최악의 날이 됨은 틀림없는 듯했다.

 

***

 

김독자는 특별할 것 하나 없는 사람에 속했다. 소설에 비유하면 배경 서술에서나 잠깐 볼 수 있는 지나가는 마을 사람 1 정도일까. 그것도 아니면 배우에게도 속하지 못하는 관람객 중 한 명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어느 쪽이든 현실에서도 김독자는 그것들과 별반 다를 것 없는 위치에 있었다. 그는 반에서 소위 논다고 칭하는 무리에게 얻어맞고 살았으며. 그 역시 그러한 삶을 부정하지 않았다.

내 자리는 여기다. 처음부터 아무것도 가지지 않았기 때문에 무엇도 가질 수 없는. 참고 참아 밑바닥을 기어 덧없이 사라질 엑스트라. 김독자(獨子)는 자신의 주제를 잘 파악하고 있었고, 독자(讀者)는 주인공이 될 수 없음의 법칙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런 그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저 지옥과도 같은 이 무대를 내려가는 순간만을 기다리는 것뿐. 바라 마지않는 때가 오면, 홀로 사라지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지독한 매타작 속에서도 김독자는 독백했다. 아직은 때가 아니다. 매일 같이 폭력을 당해 멍이 늘어나도 견뎌내며 그는 생각했다. 아직은 아니다. 송민우 패거리로 인해 다리가 부러지면서도 계속해서 기다렸다. 아직은 때가 오지 않았다. 살인자의 아들이라고 불리면서까지도 미련한 기다림은 이어졌다. 언제 오게 될지도 모르는 때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왜 그랬는지는 자신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냥 막연하게 아직은 아니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어쩌면 그것은 살고 싶다는 마지막 외침이었을지도 모르지. 지금에 와서는 전부 무의미한 일에 불과했지만 서도.

 

그냥 죽는 게 낫지 않겠냐는 송민우의 말은 기폭제가 되었다. 그제야 비소로 김독자는 자신의 역에도 마지막 장면이 찾아왔음을 깨달았다. 메인 시나리오는 끝나지 않아도 단역들은 무대 뒤로 퇴장할 차례가 왔음을. 그리고 자신의 이야기에 정말로 끝이 찾아왔다는 것을. 마침내 종말을 마주한 독자(讀者)는 지루하기 짝이 없는 독자(獨子)의 이야기를 덮었다. 그리고 그는 자살을 결심했다.

 

그렇다면 유중혁은 어떨까. 그는 성류고등학교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평범하지 않은 전학생에 속했다. 본인은 평범하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남들 역시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원래 본인이 대단한 건 본인만 모르는 법이라잖아? 그 말은 정확하게 맞아떨어졌다. 학교에 있는 모두는 그날 생각했다. 유중혁은 특별한 사람이라고 말이다.

 

소설로 치면 그는 주인공과 같은 인물이었다. 일단은 얼굴부터가 주인공이 아니면 가질 수 없는 외모였다. 모든 이야기의 중심에 서 있는 존재. 이야기의 주인이 되는 자. 그런 사람이 아니고서야 신이 조각했다고 해도 믿을만한 얼굴을 지니고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비단 겉모습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그는 진정으로 주인공에 어울리는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두뇌. 재능. 실력. 노력. 무엇하나 빠지지 않는 그는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어 마땅한 존재였다. 모두에게 사랑받아 마땅한 존재. 정말이지, 김독자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따라서 김독자는 유중혁에 의해 구해졌던 그 날. 언젠가 반드시 이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되리라 생각했다. 그리고 지금 그는 그 대가를 톡톡히 치르고 있었다. 작년에는 고시원에 틀어박혀 나올 생각도 하지 않았을 시기에 김독자는 카페에 들어와 아이스 초코를 노려보는 중이었다. 그것도 눈알이 튀어나올 정도로 잘생긴 미남, 유중혁과 마주 앉아서. 왜 그러고 있냐고? 그건 그가 묻고 싶은 말이었다. 눈앞에 놓인 갈색의 액체는 다디단 향을 내뿜고 있었으나 김독자는 그 모든 게 쓰게만 느껴졌다. 단전에 쌓여있던 한숨이 올라오는 기분을 애써 외면하며 빨대를 입에 물었다. 숨을 들이쉬듯 한 모금 빨아들이자 다디단 액체가 입안으로 넘어온다. 냉기로 인해 팽팽 돌기 시작한 눈을 질끈 감았다. 어쩌다 이런 일이 된 거지? 자신에게로 쏟아지는 유중혁의 시선에 김독자는 울 것 같은 얼굴이 되었다.

 

하필이면 자리마저 가게 입구 근처로 잡아서 더욱 시선이 쏠렸다. 전부 유중혁 탓이었다. 만일 당신이 카페 문을 열고 들어갔는데 그 바로 앞에 미쳤다는 감상이 절로 나오는 미남이 앉아있다면 그냥 지나칠 수 있겠는가? 김독자는 답했다. 그럴 리가. 그래, 그럴 리가 없다. 유중혁의 얼굴은 표현하는 말에 세계 미의 축이라는 말이 들어가도 틀릴 게 없을 정도이며. 그 부분에 대해서는 김독자 역시 부정하지 않았다. 자신조차 눈알이 튀어나올 만큼 잘생기게 보이는데 남들은 어련할까.

 

그렇다고 해서 자신들을 향한 시선이 달갑다는 말은 아니다. 비록 그 시선은 전부 앞에 있는 이 녀석을 향한 것이겠지만, 함께 있는 김독자에게 그들의 눈길이 아예 닿지 않는 것도 아니었고. 김독자에 닿는 것만큼은 눈길에 담긴 뜻이 좋지 못하기도 했다. 비단 그런 이유가 아니더라도 남들의 시선에 익숙지 않았던 그로서는 곤란하기 짝이 없는 상황이었다. 힐끔. 눈동자를 굴려 유중혁의 반응을 살피던 김독자는 눈이 마주치자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낯짝도 두껍지. 남들의 시선은 일절 무시한 채 자신을 바라보는 녀석의 시선에 빨대 끝을 잘근잘근 씹었다. 기나긴 침묵이 이어졌다. 지독하게 무겁고 거북한 침묵이었다.

 

할 말 없으면 나는 돌아가 봐도 될까?”

 

먼저 입을 연 사람은 김독자였다. 그는 진심으로 그곳을 벗어나고 싶었다. 카페 내부는 쾌적했다. 쾌적하다 못해 서늘할 지경이었다.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이 있고 실시간으로 돌아가는 에어컨은 한결같이 찬 바람을 내뿜었다. 잠시 더위를 피해 들어온 사람들은 카운터로 다가가 주문을 하고. 알바생의 익숙한 멘트와 함께 한쪽에서는 진동벨 소리가 들려왔다. 음료를 다 마신 사람이 픽업 대에 올려두고 간 컵이 부닥치는 소리도 들려온다. 누군가에게는 정말 익숙하고 평범한 것들일지 모르나 김독자에게 있어서는 하나같이 낯선 무언가에 불과했다.

 

주문하는 것도.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에어컨의 차가운 바람도. 사람이 많은 카페에 앉아 있는 것도. 평화로운 이야기 소리도. 녹아내린 얼음에 밍밍해진 아이스 초코의 맛도. 그리고 자신의 맞은편에 앉아 제 얼굴을 빤히 바라보는 유중혁의 시선까지도. 그 모든 것이 불편하게만 느껴졌고 김독자는 이 자리를 벗어나고만 싶었다. 하지만 유중혁은 대답하지 않았다.

 

저기. 네가 나한테 왜 이러는지 모르겠지만. 정말로 난 돌아가고 싶거든?”

어째서지?”

 

유중혁의 물음에 입을 닫았다. 왜냐고? 정말 몰라서 묻는 걸까? 눈썹을 찌푸린 김독자는 앞에 앉은 그를 노려봤다. 그조차 얼마 가지 못하고 그만뒀지만 서도. 그래, 너는 모르겠지. 당연하다는 듯 웃음이 흘렀다. 질투? 자격지심? 그런 종류의 얄팍한 감정이 아니다. 유중혁과 김독자는 사는 세계부터가 달랐기 때문에 그런 것은 느껴지기도 전에 지워졌다. 그저, 그는 그런 것을 몰라도 괜찮은 위치의 사람이라고 생각함으로써 간단하게 수긍해버리는 자신의 모습이 우스웠을 뿐이다. 미소를 지운 김독자는 대답했다.

 

너는 이런 장소에 익숙할지 몰라도 나는 아니라서.”

익숙하지 않은 게 문제라면 익숙해지면 그만이지 않나?”

그게 말처럼 쉬운 일로 보여?”

그렇다면 내일도 여기서 만나면 되겠군. 오지 않으면 네놈의 집으로 찾아가겠다.”

 

시발, 진짜. 튀어나오는 욕을 씹어 삼키며 유중혁과 시선을 맞췄다. 뭔가 문제라도 있냐는 듯한 시선과 짜증으로 일그러진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혔다. 역시 그때 죽었어야 했는데. 더는 돌아오지도 않을 지난날을 후회하며 김독자는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유중혁 역시 그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데려다주겠다. 유중혁이 말했다. 필요 없어. 김독자는 그리 대꾸하며 빠르게 카페를 벗어났다. 문을 열자 뜨겁게 달궈진 공기가 폐부를 가득 채웠다. 장마가 지나간 8월의 오후는 여전히 후덥지근했다. 대로변으로 들어서자 새카만 아스팔트 위로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시끄러운 매미 소리가 귓가를 때린다. 익숙한 풍경을 바라보며 김독자는 입술을 깨물었다.

 

***

 

내일은 아침 7시까지 움직이기 편한 복장으로 집 앞에 나와 있어라. 데리러 가겠다.”

 

앞뒤를 다 잘라먹은 말에 김독자는 황당하다는 얼굴이 되었다. 난데없는 폭탄 발언을 하고도 유중혁은 평소와 별반 다르지 않은 표정을 했다. 저기, 중혁아. 좀 알아들을 수 있게 말을 해줄래? 계속된 만남으로 호칭이 에서 중혁으로 바뀌긴 했으나 아직도 녀석의 화법에는 익숙해질 수가 없어 김독자는 구시렁거렸다. 유중혁을 만난 지 어느덧 14. 여름방학은 앞으로 일주일을 남겨둔 8월의 둘째 주 토요일 늘 같은 카페의 같은 자리에서였다.

 

대체 어디를 갈 생각이길래?”

남평역에 갈 거다.”

 

아니, 거긴 왜. 미간을 잔뜩 찌푸리자 주름진다며 유중혁이 손을 뻗어온다. 이 나이에 주름이 질 리가. 톡 쏘아붙이듯 말을 내뱉자 또 모를 일이라며 손을 거두지는 않는다. 처음에는 이런 신체접촉에 익숙지 않아 쳐내고는 했는데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은 지경에 이르렀다. 익숙해지면 안 되는데.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미간을 문질러오는 손길을 밀어내지는 못했다. 무의식중에 입술을 깨물자 이번에는 입술 위로 엄지가 올려졌다.

 

입술, 자꾸 깨물면 상처 난다.”

버릇이니까 냅 둬.”

그래도 딱지가 지면 나중에 힘들지 않나.”

중혁아, 우리 엄마도 이런 식으로 날 챙기거나 하지는 않아.”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렇게 챙길 어머니가 곁에 계시지 않는다는 게 맞겠지만, 굳이 정정해줄 생각은 없었다. 아 다르나 어 다르나 결국 자신을 그렇게 챙기는 사람은 너 말고는 없다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요지부동인 유중혁에 김독자는 입술을 놓아줄 수밖에 없었다. 진짜 황소고집 새끼. 그런 의미를 담아 눈을 흘기자 뭐가 문제냐는 시선만 되돌아왔다.

 

가서 뭐 할 건데?”

그건 비밀이다. 내일 가보면 알게 될 거다.”

 

그럼 대체 뭘 어떻게 입어야 할지 어떻게 알아. 김독자는 당장에 이 답답한 녀석의 머리카락을 쥐어뜯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참자, 참아야 한다. 저 잘생긴 외모에 흠이라도 생기면 나중에 땅을 치고 후회하는 것은 김독자 너 자신이다.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속을 애써 추스르며 고개를 끄덕이자 유중혁이 입술을 끌어올렸다. 아주 희미한 움직임이었으나 적어도 그는 알아볼 수 있었다. 미친, 진짜 잘생겼네. 반짝반짝 빛이 나는 듯한 환각에 한숨을 쉬었다. 최종적으로 패배하는 것은 김독자였다.

 

***

 

주변을 둘러봐도 보이는 것이라고는 풀, 나무. 그리고 차는 한 대도 돌아다니지 않는 도로. 그리고 다시 풀과 나무. 어딜 보나 똑같은 풍경이 새삼스럽지만, 신기하게만 느껴졌다. 이런 곳이 있는 줄은 몰랐는데. 나지막이 읊조리며 나아가기 무섭게 유중혁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김독자, 혼자 가면 길 잃는다.”

, 유중혁. 너 그거 진짜 과보호라니까?”

오징어처럼 흐느적거리지나 말고 이야기해라.”

 

! 오징어 아니라고! 버럭 소리를 지름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녀석은 오징어처럼 흐느적거리는데 그럼 뭐라고 하냐는 말을 당당하게 내뱉었다. 아오, 진짜. , .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욕을 꾸역꾸역 삼켜 눈동자에 담아낸 김독자는 그대로 유중혁을 쏘아보았다. 이번에도 얼마 가지 못하고 그만두고 말았지만. 그래도 나름 기분은 풀린 것 같아 다시 한적한 풍경을 시야에 가득 담았다. 고요함으로 가라앉은 거리에 남은 사람은 자신과 유중혁뿐이다. 그리고 그 사실이 김독자는 제법 마음에 들었다.

 

얼마나 더 가야 해?”

 

앞서 걸어가던 김독자는 차츰 속도를 늦춰 유중혁의 걸음에 맞췄다. 꽤 거리가 있을 것으로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몇 걸음 뒤돌아가지 않아 녀석의 곁에 다다를 수 있었다. 얘 처음부터 일정한 속도로 걷지 않았나? 잠시 고민에 빠졌던 김독자는 이내 그 생각을 털어내며 유중혁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언제부터인지 몰라도 녀석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상태였다.

 

여길 지나면 남평역이다.”

 

커다란 녹색의 철문을 지나며 유중혁은 대꾸했다. 앞을 향해 고개를 돌리자 커다란 나무 뒤로 건물 하나가 자리 잡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저게 남평역이야? 김독자의 물음에 유중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등록문화제 299호로 지정된 곳이지. 그런 곳에 왜 온 건데? 네놈이 너무 흐느적거리길래 운동이라도 시킬 목적이다. 뭐 인마? 투덕거리며 길을 따라 걸어가다 보니 어느새 역사 근처에 도착해 있었다. 들어갈 거야? 유중혁은 대답하지 않은 채 몸을 돌렸다. 김독자 역시 다른 질문은 하지 않은 채 그 뒤를 따랐다.

 

녀석이 향한 곳은 더는 열차가 들어오지 않는 철길이었다. 이제는 따로 관리하지 않아 녹이 슬어 붉게 변해버린 레일. 그곳으로 성큼성큼 나아간 유중혁은 뒤를 돌아 김독자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가만히 바라보다 고개를 들어 올려 시선을 마주했다. 중혁아. 가느다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몇 번이고 입을 달싹이며 무어라 말을 꺼내 보려 했으나 번번이 실패하고 말아 결국 입을 꾹 다물었다. 유중혁은 그런 김독자의 손을 잡고는 몸을 돌렸다. 이번에도 녀석이 하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

 

레일 주변에는 익숙한 자갈들이 깔려 있었다. 고개를 돌리면 옆으로는 나무가 우거진 숲이 보였다. 두 개의 발소리만이 철길을 울렸다. 그 외에 다른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로부터 쏟아지는 햇살은 뜨거웠으나 유중혁에게 잡힌 손은 그보다 더 강한 열기를 품고 있었다. 누구 하나 먼저 말을 꺼내는 일은 없었다. 자갈을 밟는 소리에 맞춰 끝없이 이어진 철길을 걷고 또 걸어갈 뿐이었다. 발소리를 뺀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러나 이전처럼 불쾌하지는 않았다.

 

중혁아.”

 

김독자가 운을 뗐다. 시선을 바닥을 향해 있었다. 이전부터 물어보고 싶은 게 있었는데. 그 말을 끝으로 다시 침묵이 이어졌다. 답답하고 묵직한 공기가 두 사람을 에워싸는 기분이었다. 유중혁은 기다렸다.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며 다음 말이 들려오기만을 가만히 기다렸다. 그리고 김독자는 몇 번이고 자신이 해야 할 말을 고르고 또 골랐다.

 

대체 내게 왜 이러는 거야?”

 

마침내 유중혁의 다리가 멈추었다. 잇따라 김독자 역시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유중혁은 뒤돌아보지 않았다. 녀석은 여전히 앞을 바라보고 있었고. 김독자는 그런 유중혁의 운동화의 뒤축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한참이 지나도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그리고 김독자는 그것이 유중혁만의 답이라고 여기며 쓰게 웃었다. 아니야, 방금 질문은 잊어줘. 그제야 유중혁의 입이 열렸다.

 

여름방학이 곧 끝날 거다.”

 

그 한마디로 김독자는 모든 것을 깨달았다. 유중혁이 하고자 하는 말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이해하고 싶지 않아도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곧 개학이 찾아온다. 김독자는 다시 학교에 나가게 될 것이고 그것은 유중혁 역시도 같을 것이다. 그게 뭐? 누군가는 그렇게 말할 수도 있지만, 그에게 있어 그 의미는 조금 다르게 와닿았다. 과거의 자신에게는 없을 시간이 생겼다. 내일도 어디에서. 내일은 같은 곳에서. 유중혁과 잡은 수많은 약속으로 살아간 시간이 생겼고 그렇게 꼬박 삼 주를 채웠다. 어쩌면 이미 끝났을지도 모르는 이야기가,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이야기로 채워지고 있었다. 그렇게 김독자는 하루하루를 살아갔다.

 

김독자.”

 

이름이 불렸다. 그저 그뿐인데도 불구하고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나를 부르는 호칭은 뭐가 있더라. 여러 가지가 떠올랐지만, 그중 제 이름은 가장 나중에서야 떠올랐다. 왜지? 김독자는 자문했다. 어째서 내 이름이 마지막에 떠올랐지? 답이 나오지 않자 이번에는 질문을 바꿨다. 유중혁이 불렀을 때는 왜 이상한 기분이 들었지? 여전히 답은 나오지 않았다. 이번엔 다르게 생각했다. 유중혁이 부른 이름은 왜 특별하게 들렸지? 그제야 머리가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이유는 단 하나였다. 여태까지 그렇게 다정한 목소리로 이름을 불린 적이 없었으니까. 조금, 목이 메는 기분이 들었다.

 

김독자는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몸을 돌린 유중혁이 시선을 마주해왔다. 잡힌 손에 땀이 찼으나 녀석은 개의치 않는 듯했다. 김독자 역시 놔달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무언가 단단하게 새워놨던 벽이 이 열기에 녹아내릴 것만 같아서. 그것이 몹시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피할 수 없는 막연한 감각에 사로잡혀 있는 기분이 들었다. 유중혁이 웃었다. 검은 눈동자에 비친 김독자는 울고 있었다.

 

?”

 

그제야 시야가 흐리다는 것을 눈치챘다. 짜디짠 액체가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잡히지 않은 손으로 그것을 닦아내자 물기가 묻어나는 것이 보였다. ? 걷잡을 수 없이 쏟아지기 시작한 눈물에 김독자의 표정이 당황으로 얼룩졌다. 유중혁은 그것을 고요히 바라보며 손을 뻗었다. 유리구슬을 다루듯. 혹여라도 깨질까 봐 겁을 내듯. 조심스러운 손길로 그 눈물을 닦아내며 나직한 문장을 내뱉었다. 그리고 그 말을 들은 김독자는 막혀 있던 슬픔을 터트리듯 커다란 울음소리를 토해냈다.

 

가을에는 레일 바이크를 타러 가지. 그때는 지금보다 더 아름다운 풍경으로 물들어 있을 테니.”

 

가을. 그 단어가 지닌 의미는 무엇보다도 커다랬다. 김독자가 꿈꾸지 않은 미래. 무엇도 가지지 못한 채 태어난 그가 가지게 될 첫 번째 미래. 후들거리는 다리를 지탱하지 못한 채 무너져 내렸다. 유중혁은 그런 그를 끌어안아 지탱하고는 조용히 등을 토닥였다.

 

발악과도 같은 울음소리를 비집고 시끄러운 매미 소리가 들려왔다. 곧 지날 이 시기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음을 알리듯 누구보다 열정적이고 누구보다 강한 생명력이 담긴 소리였다. 김독자는 그 소리가 어쩐지 저를 닮은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더욱 큰소리로 울음을 터트렸다.

 

유중혁의 토닥임은 울음소리가 잦아들 때까지 이어졌다. 한바탕 울음을 쏟아낸 김독자는 고개를 들었다. 눈물로 젖은 새하얀 뺨 위로 황혼이 드리웠다. 그것을 가만히 바라보던 유중혁은 조용히 손을 뻗었고 여름을 닮은 뜨거운 체온이 발갛게 짓무른 눈가에 닿았다. 그 모든 과정이 물 흐르듯 이어져 김독자는 눈을 내리감았다. 이윽고 호흡이 겹쳐졌다.

 

***

 

능숙하게 주문을 끝마친 김독자는 늘 앉았던 테이블 위로 진동벨을 올리고 자리에 앉았다. 더운 여름날의 카페에는 언제나처럼 손님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상시 가동되는 에어컨 바람 덕에 내부는 쾌적했다. 쾌적하다 못해 추운 느낌마저 든다. 털이 쭈뼛 스는 기분에 팔을 문지르고 있자 그 모습을 지켜보던 유중혁이 물었다. 추운가? 김독자가 대꾸했다. , 조금? 잠시만 기다려라. 담요를 달라고 하겠다. 아니, 그럴 필요까지는 없는데. 손을 가볍게 흔들며 웃음소리를 내자 영 못 미덥다는 시선이 되돌아왔다.

 

중혁아, 너 그거 과보호야.”

네놈에겐 과보호가 좀 필요하다.”

 

진지한 얼굴로 어울리지도 않는 말을 내뱉는 모습이 퍽 웃기다. 과하다, 중혁아.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진동벨이 울렸다. 아이스 초코랑 아이스 아메리카노, 허니 브레드 나왔습니다! 알바생의 커다란 소리에 몸을 일으킨 유중혁이 물었다. 허니 브레드도 시켰나? , 배고파서. 안 되냐는 표정으로 고개를 슬 기울이며 묻자 고개를 흔든다. 안 될 것은 없다. 이미 예상한 대답에 또다시 미소가 피어났다. 음료와 디저트가 담긴 쟁반을 들고 자리로 돌아온 유중혁을 향해 김독자는 살짝 손을 들었다. 쟁반 위에 검은 것은 아무래도 담요인 듯했다.

 

짙은 갈색의 액체가 자신의 앞에 내려졌다. 그리고 그 옆에 검은색의 담요도 같이 내려졌다. 필요 없다니까 그러네. 희미하게 웃음기 밴 목소리를 흘린 김독자는 아이스 초코에 꽂힌 빨대를 물었다. 숨을 들이쉬듯 한 모금 빨아들이자 다디단 초콜릿의 향이 입안에 밀려들었다. 언제나처럼 그 모습을 지켜보던 유중혁은 자신의 앞에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내린 후 자리에 앉았다. 달그락하고 얼음이 부닥치는 소리가 들렸다. 매번 그것만 마시면 질리지 않나? 그 물음에 김독자는 눈을 내리뜨며 잔을 바라봤다. 투명한 잔의 겉면에 맺힌 물방울이 면을 타고 흘러내렸다. 별로 질리지 않아. 평소와 다름없이 흘러나온 대답에 유중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비일상이 일상에 자리 잡은 8월의 셋째 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