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서 오세요, 스타스트림에!

 

안녕하세요.

여기는 꿈과 희망의 나라, 스타스트림입니다.”

 

***

 

아저씨! 우리 다음엔 저거 타요!”

제가 먼저 줄 서고 있을게요!”

얘들아, 잠깐, 잠깐만.”

 

황급히 뻗어진 희멀건 손끝에 옷자락을 스치며 아이들은 순식간에 달려 나갔다. 까르륵 웃는 소리 뒤로 독자는 한숨을 내쉬었다. 앱으로 예약하면 되는데. 하긴, 어차피 평일 낮. 어지간한 놀이기구는 운행을 한 두 번 정도만 기다리면 바로 순서가 찾아오곤 했다.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까지 사람이 없을 수가 있나?”

 

대학생들이 아직 종강하지 않은 때라 그런지 놀이공원은 생각보다 더 한산했다. 순서를 오래 기다릴 필요도 없고, 아이들을 찾기도 어렵지 않고. 역시 월차를 내길 잘했다고 생각하며 김독자는 뒤돌아보는 아이들을 향해 손을 흔들어 주었다.

 

, 여기 앉아요!”

 

천천히 걷는 동안 순식간에 이길영과 신유승의 차례가 돌아왔다. 바이킹 안으로 달려가며 자신을 부르는 아이들에게 김독자는 고개를 저어 보였다.

 

이번엔 너희들끼리만.”

 

옅게 미소짓는 김독자를 빤히 보던 아이들은 이내 서로를 향해 얼굴을 찡그렸다.

 

, 이길영, 넌 내려.”

나도 너랑 둘이 타기 싫거든? 저쪽으로 떨어져.”

 

그렇게 말한 주제에 바이킹이 움직이기 시작하자 어느새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역시 애들은 애들, 무섭긴 무서운 모양이지. 같이 타 줄 걸 그랬나 싶다가도 울렁거리는 속에 다시 고개를 저었다. 어느새 적응했는지 양손을 번쩍 들고 즐거운 표정을 짓는 사랑스러운 얼굴들을 카메라에 담았다. 입가에는 미소가 흘렀으나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르기에, 가까이에 놓인 벤치에 털썩 주저앉았다.

 

조카들 데리고 오셨나 봐요?”

 

옆을 돌아보니 직원 유니폼을 갖춰 입은 인상 좋은 남자가 자신을 보며 웃고 있었다.

 

, , .”

좋은 삼촌이시네요.”

, 아닙니다. 평소엔 잘 보러 가질 못해서.”

아이들 표정이 무척 행복해 보입니다.”

 

괜스레 부끄러운 마음에 귀 끝이 달아올랐다. 남자는 한 번 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가볍게 묵례한 후 제 갈 길로 갔다. 언뜻 보인 명찰에 공연 가이드 이현성이라는 이름이 보였다. 직원을 칭찬하는 코너 같은 것을 본다면 한 줄 적어놔야겠다고 생각했다. , 그 전에 유상아씨가 먼저일까. 김독자는 유상아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 고맙습니다. 덕분에 아이들과 잘 놀고 있어요. ]

 

지금은 퇴사한 유상아는, 회사에서 드물게도 괜찮은 사람이었다. 회사 사람들과 개인적인 교류가 전무하던 자신에게 입사 동기라며 친근하게 대해주던 사람. 다정하고 상냥해 보이는 이면에 확고한 소신과 강단이 있다는 것은 어느 날 탕비실에서 쌓인 그들만의 설화이기도 했다. 물론 그건 둘만의 비밀이고, 워낙에 평판이 좋은 사람이니 당연히 정규직이 되겠거니 싶었다. 그래서 갑자기 퇴사한다는 이야기에 적잖이 놀라기도 했고, 어쩌면 친구가 될 수 있었을지도 모를 사람이 떠난다는 것에 뒤숭숭하기도 했는데.

 

[ 덕분은요. 잠시 시간 나면 연락할 테니 가지 말고 계세요. ]

 

, 한창 바쁠 사람에게 괜히 마음 쓰이게 한 걸지도. 알아서 잘 놀다 갈 테니 신경 쓰지 말라고 해야겠다.

 

[ 길영이랑 유승이가 보고 싶거든요. 독자 씨 말고요. ]

 

어디선가 후후, 하고 웃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정말이지 유상아는 이길 수가 없다.

 

[ 알겠습니다. 아마 폐장 때까지 있을 것 같으니 편하실 때 연락해주세요. ]

 

미노 소프트는 나름대로 대기업 계열사인 만큼 사회 공헌에도 제법 신경을 쓰는 편이었다. 작년 이맘때였나, 황금 같은 휴일에 억지로 끌려간 봉사활동에서 이길영과 신유승을 만났다. 곤충 채집을 하는 길영이를 따라다니다 발이 꼬여 넘어지고, 유승이가 돌보는 대형견이 달려드는 바람에 바닥에 나뒹굴었던 것이 아이들과의 첫 만남이었다.

 

흔한 일이었다. 누군가의 발에 걸려 넘어지는 것도, 갑자기 덤벼드는 바람에 흙투성이가 되었던 것도. 그리고 그 뒤에 이어지는 웃음까지도. 익숙한 풍경이지만 다른 것이라면 웃음의 온도였다. 그 낯설면서도 따스한, 생소하면서 그리운 온기. 남국에 불시착한 설국의 여행자처럼 어찌해야 할지 몰라 그저 따라 웃었을 뿐인데 눈가가 아려왔던가. 그 후, 한 번 맛본 온기에 이끌려 주말마다 아이들을 보러 가곤 했다. 그리고 그 때마다 유상아와 마주치곤 했다.

 

아저씨! 이길영 겁 진짜 많아요! 얼마나 소리를 지르는지 귀가.”

, 무서워서 그런 게 아니라 신나서 그런 거거든!”

 

어느새 탑승 시간이 끝났는지 아이들이 김독자에게 쪼르르 달려왔다.

 

얘들아. 알겠으니까 이제 저녁 먹을까?”

벌써요?”

멍청아, 5시 전에 먹어야 런치로 싸게 먹을 수 있단 말이야.”

 

그런 사정까지는 생각하지 않아도 될 텐데. 멋쩍게 웃으며 김독자는 손에 들린 종이를 만지작거렸다. 미노 소프트를 퇴사한 유상아는 테마파크 공연팀에 정직원으로 입사했다. 공연팀이라는 말에 역시 못 하는 게 없는 사람이라며 눈을 휘둥그레하게 뜨자, 유상아는 웃는 얼굴로 명함을 내밀었다. 임직원 할인이 되니까 아이들 데리고 한 번 와달라는 말과 함께. 흔한 인사치레라 생각하며 적당히 고개를 끄덕이니 그녀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얼마 후에 테마파크 입장권과 함께 테마파크 내에 있는 패밀리 레스토랑 식사권이 사무실로 배송되었다.

 

역시 유상아는 이길 수 없다. 김독자는 청포도 에이드를 쪼로록 거리며 창밖으로 내려다보이는 정경을 바라보았다. 이런 데서 일하는 건 어떤 기분이려나. 계약이 만료되어가니 별생각이 다 든다.

 

***

 

매니저님, 큰일 났어요!”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유상아가 황급히 달려갔다. 둘러싼 사람들 한가운데에는, 쭈그려 앉은 배우가 인상을 잔뜩 찡그린 채로 발목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몸을 살짝 굽히고 살펴보니 상당히 부어오른 것이 예사롭지 않았다.

 

의무실에 연락할 테니 잠시 쉬고 있어요. , 그리고 냉동실에 얼음팩 있으면 가져다주시겠어요?”

 

지시에 따라 옆에 있던 배우가 황급히 냉장고를 향해 달려갔다. 그러는 동안 유상아는 핸드폰에서 익숙한 연락처를 찾았다.

 

설화 씨, 지금 빨리 공연 연습실로 와주실 수 있나요? 발목 부상을 당하신 분이 있어서요.”

 

언제 왔는지 유상아의 옆에서 다친 배우를 살펴보던 한수영이 고개를 저은 후 다친 배우에게 말했다.

 

, 오늘은 집에 가.”

하지만.”

오늘만 공연하고 관둘 생각 아니면 닥치고 얌전히 쉬고 있어.”

 

냉정한 말투였지만 정확한 판단이었다. 가벼운 염좌는 즉시 냉찜질을 해서 붓기를 가라앉히고 며칠 치료를 받으면 금방 낫는다. 괜히 무리했다간 일주일 정도 쉬면 될 경미한 부상으로 몇 달을 고생하는 수가 있었다. 특히나 온종일 발목을 써야 하는 퍼레이드 댄서라면 말할 것도 없었다. 유상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감독님 말씀이 맞아요. 일단 설화 씨가 오시면 응급처치받으신 후 바로 퇴근하세요. 우선 일주일 병가 내시는 것으로 알고 있을게요. 더 오래 쉬셔야 할 것 같으면 연락하시고요.”

 

어느새 달려온 이설화의 응급 처치가 이루어지는 동안 한수영은 한숨을 쉬었다.

 

지금 몇 시지? 다른 날 같으면 비우고 가면 되는데. 하필 오늘 본부장인가 뭔가가 시찰한다잖아.”

 

새로 들어가는 공연도 아니니 굳이 감독이 달려올 만한 일이 아니었음에도 그녀가 직접 온 것이 그제야 이해가 되었다. 유상아의 얼굴에도 종전과는 다른 난감함이 서렸다.

 

나이트 퍼레이드는 남는 인원이 없어서 큰일이네요. 그나마 메인 캐릭터가 아닌 분이라 다행이라 할지.”

근처에 할 일없는 애 없대?”

단톡방으로 연락해봤는데 시간을 맞출 수 있는 분이 없어요. 동선 조정해서 자리를 채우는 수밖에요.”

 

. 아까 걔 자리 그거지? 거기가 별거 아닌 거 같아도 비면 또 은근히 허전하단 말이야.”

 

잠시 고민하던 한수영이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렸다.

 

공연팀 아니어도 적당히 자리 채울만한 애 없어?”

 

유상아는 문득 손을 내려다보았다. 스마트폰이 깜박거리며 새로운 메시지가 온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메시지의 내용을 보며 잠시 생각에 빠졌던 그녀는 불현듯 발신 버튼을 눌렀다.

 

독자 씨!”

?”

 

유상아 답지 않은 다급한 목소리에 김독자는 저도 모르게 멍청한 소리를 내었다. 벌써 일이 끝난 걸까. 그러나 시계는 이제 막 6시를 가리킬 따름이었다.

 

오늘 폐장 때까지 계신다고 했죠?”

? . 애들이 퍼레이드 보고 싶다고 해서요.”

그럼 독자 씨, 현대무용 전공 맞죠?”

? 갑자기 무슨. 중간에 자퇴하긴 했습니다만. 그건 왜요?”

 

뜬금없이 전공을 문는 것에 의아함만 점점 커지고 있었다. 사유를 묻고자 하는 김독자의 말을 끊어내듯 유상아가 다시 물었다.

 

지금 어디세요?”

애들이랑 밥 먹고 있었어요. , 이용권 주신 거기서요.”

그럼 미안한데 저 한 번만 도와주실 수 있죠? 자세한 건 이따가 설명할게요.”

뭔데요? 제가 도울 수 있는 거라면 도와 드리겠지만.”

약속하신 거예요?”

 

김독자는 어안이 벙벙해진 채로 핸드폰을 응시했다. 대체 무슨 일이길래 저 유상아가 이러는 거지? 앞을 보니 아이들도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신을 보고 있었다.

 

뭔진 모르겠는데 상아 씨가 오는가 봐.”

 

***

 

, 상아 언니!”

상아 누나!”

얘들아, 오랜만이네. 그리고 독자 씨, 놀라셨죠? 미안해요. 그런데 제가 좀 급해서요.”

 

미소 띤 얼굴로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은 유상아는 언제나처럼 여유로운 표정으로 김독자를 응시했다. 아까의 통화에서 다급해 하던 것이 거짓말이기라도 했던 듯 머리카락 하나 흐트러짐이 없었다. 역시 유상아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요. 독자 씨, 오늘 공연 좀 도와주세요.”

네에?”

 

당황해서 떡 벌어진 김독자의 입에서 빨대가 떨어졌다. 그것을 친절하게 집어 컵에 다시 꽂아 넣으며 그녀가 말을 이었다.

 

오늘 나이트 퍼레이드 연기자가 조금 전에 부상을 당했는데, 하필 대체 인원이 없어서요. 그래서 독자 씨의 도움이 필요해요.”

도움이라니. 대체 어떤,”

땜빵.”

 

낯선 목소리에 흠칫 놀라 옆을 돌아보았다. 단발머리를 한 여자가 눈을 치켜뜨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그마한 키에 살짝 올라간 눈꼬리가 당차 보이는 사람이다.

 

어려운 역할 아니니까 유상아 지인이면 협조 좀 부탁합니다. 그쪽이 신세 진 것도 많다면서요.”

 

독자 씨가 저한테 신세 진 건 없어요.”

지금 현재 진행형으로 신세 지고 있는 것 같은데?”

 

존댓말이 맞는데도 이상하게 반말처럼 들리는, 영화에서 빚쟁이들이 주로 쓰던 말투였다. 황당한 표정의 김독자를 본체만체하며 단발은 턱 끝으로 식사의 흔적을 가리켰다. 먹었으면 밥값을 하라는 의도가 여실하게 느껴졌다.

 

퍼레이드 루트를 한 바퀴 돌면서 간단한 동작만 해주시면 돼요. 제가 웬만하면 이런 부탁 안 드리려고 했는데 오늘이 좀 중요한 날이라서요. , 공연 시간은 30분이고요.”

잠깐, 잠깐만요.”

 

뭐가 뭔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자 단발이 다시 말을 꺼냈다.

 

뭐가 문제야, 애들? 애들도 같이 세워. 유상아, 공연 참가 신청 자리 남았지?”

. 그러고 보니 아이들도 같이 공연하면 좋겠네요. 길영아, 유승아. 너희도 퍼레이드에 참여할래? 마차에 타서 손만 흔들어주면 되는데. 멋진 옷도 입고.”

, 저 그거 해보고 싶었어요! 할래요!”

신유승 말고 저만 하면 안 돼요?”

 

들뜬 아이들을 보며 고개를 저은 유상아가 온화한 미소로 김독자를 응시했다.

 

다 같이 있어야 해. 물론 독자 씨도.”

아저씨.”

혀엉.”

 

역시 유상아는 이길 수 없나 보다.

 

***

 

One, two, three and four! Five, six, se-ven eight!

박자에 맞추어 몸을 움직이는 것이 대체 얼마 만인지. 거울 속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을 보며 독자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때, 도망치듯 뛰어나갔던 것이 벌써 5년 전이다. 다시는 무대에 서는 일 따위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아니, 엄밀히 말하면 퍼레이드 루트에 무대는 포함되어 있지 않으니 그때의 다짐에서 벗어난 것은 아닌 지도 모른다.

 

똑바로 해라. 이래서 급하게 들어온 놈들은.”

죄송합니다.”

 

딴생각을 하던 것이 티가 난 모양이다. ‘죄삼다에 가깝게 발음하고는 다시 박자에 몸을 맞추는 자신을 보며 잘생긴 외국인은 얼굴을 더욱 찌푸렸다. 앞에도 뒤에도, 왼쪽도, 오른쪽도 온통 외국인, 외국인, 외국인이다. 외국어에 능통한 유상아 씨가 이쪽 담당인 것이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연기자 매니지먼트 담당이라더니 다양한 국적의 배우들과 무리 없이 의사소통하는 모습을 보면 박수가 절로 나왔다.

 

퍼레이드 쪽은 잘 모르긴 하지만 대체로 기럭지가 훌륭한 러시아나 중앙아시아 쪽 배우들을 쓴다고 들었는데, 이 정도로 압도적일 줄은. 그런데 키 크고 늘씬한 이들이 대부분인 와중에 저 미친 듯이 잘생긴 외국인은 한국인 평균 키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 미스터리였다. 호기심에 빤히 바라보다가 건방진 놈이라며 뒤통수를 후려치더니 구박하질 못해 안달인 것 같았다. 아무튼 상사 복은 지지리도 없다고 생각하며 그를 흘겨보았다.

 

옆에 선 인물과의 체격 차이 탓인지 가뜩이나 작은 체구가 더욱 왜소해 보였다. 자신을 향한 시선을 눈치챘는지 남궁 민영 팀장이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호탕하게 웃어댔다.

 

우리 팀으로 오고 싶으냐? 네 놈처럼 비쩍 마른 놈은 제자로 받을 수 없다.”

 

오라고 사정해도 그 팀으론 안 갈 거라는 말은 속으로 삼키기로 했다. 귀청이 떨어져 나갈 것 같았기 때문이다. 키리오스 팀장이 일반적인 안무를 담당한다면 남궁 민영 팀장은 퍼핏이라고 불리는 거대한 소품을 몸에 짊어진-엄밀히 말하면 소품에 사람이 달린 것 같았다-이들의 동작을 담당하고 있었다. 그녀의 말마따나 자신은 저걸 어깨에 올리는 순간 납작하게 뭉개질 것이 뻔했다. 아까 봤던 인상 좋은 직원-이현성이라고 했던가-이라면 모를까. 그러고 보니 그 사람, 언뜻 봤어도 덩치가 대단하긴 했는데.

 

이제 분장 시작합니다! 순서대로 분장실로 이동해주세요!”

 

드디어 쉴 수 있는 건가. 바닥에 앉으려고 하니 누군가 어깨를 툭툭 치며 턱 끝으로 분장실을 가리켰다. 제 차례인 모양인 듯하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비척비척 걸어가는 뒤로 키리오스 코치가 혀를 차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복도를 몇 번 돌아 분장실에 도착했다. 원래 이렇게 멀었던 건지, 아니면 초행이라 헤맨 탓인지는 모르겠다. 거울 앞에 놓인 의자에 기대어있자, 분장사가 이런저런 도구를 든 손을 제 얼굴로 뻗어왔다. 어찌할 바를 몰라 불안하게 떨리는 시선을 눈꺼풀 아래로 감추기로 했다. 눈을 감고 있자니 얼굴 위로 스펀지 따위가 바쁘게 지나가고, 부드러운 솔이 두 뺨을 간지럽혔다.

 

5년 전 그날에도 이렇게 분장실에서 두 주먹을 꽉 쥐고 있었다. 걱정과 기대, 불안과 흥분이 뒤섞인 채로. 피부가 하얘서 분장할 맛이 난다던가, 작품에 어울리는 마스크라던가 하는 칭찬들에 조금 들떴던 그 시간. 몇 번인가 실신할 정도로 연습에 매진했고, 재능이 있다는 칭찬과 시기도 익숙했기에 그만큼 자신감에 넘쳐있었다. 그리고 예상대로 완벽한 무대를 만들어냈는데.

 

눈 살짝 떠 주세요.”

, .”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눈가를 스치며 부지런히 움직이는 브러시 사이로 본 적 있는 낯선 남자가 보였다. 적당하게 몸에 맞는 검은 색의 상의와 허리를 매듭지어 고정한 품이 넓은 하의. 하얗게 빛나는 얼굴에 붉게 칠한 입술과 화려한 색감의 눈 화장. 5년 전의 모습과 흡사하면서도 다른 것이 있다면, 글쎄. 김독자는 쓴웃음을 지었다.

 

마지막으로 검은색의 로브를 입고, 소매 안쪽에 붙은 스위치를 누르니 로브 위에 붙어있던 LED 전구에 빛이 들어왔다. 그 은은한 빛을 받아 눈가 아래에 붙은 큐빅들이 반짝였다. 그건 마치 눈물 자리 같았다.

 

!”

아저씨, 멋져요!”

, 그 말 내가 먼저 하려고 했거든?”

조심!”

 

분장을 마치고 나오자 신유승과 이길영이 달려들었다. 동화 속에 나오는 꼬마 요정으로 분장한 둘의 모습에 심장을 움켜쥐며 김독자는 다급히 핸드폰을 찾았다. 개인 사물을 죄다 사물함에 두고 왔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 허탈함이 밀려왔다. 상아 씨한테 사진 찍어달라고 부탁해둘걸.

 

그러는 동안 코앞까지 다가온 아이들이 자신을 향해 몸을 날리는 것을 보고 황급히 피했다. 의아한 얼굴로 올려다보기에, 로브에 여기저기 붙어있는 전구를 가리키자 아이들은 그제야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 불 들어오는 거예요?”

당연하지.”

 

버튼을 눌러 작동시키니 눈이 휘둥그레진다. 역시 애들은 애들이지.

 

, 마법사 같아요! 진짜 멋지다.”

우와아, 요정 같아요!”

너희들이 더 요정 같은데.”

맞다, 아저씨! 이따가 꼭 사진 같이 찍어요! 상아 언니가 공연 끝나면 출연자랑 기념사진 찍을 수 있대요!”

 

이쯤 되니 유상아가 머릿속을 들여다보고 있는 건 아닌지 의심이 들기 시작한다.

 

, 모두 정 위치로!”

우리 꼬마 배우들은 이쪽으로 올래?”

 

검은 정장 차림의 사람이 이길영과 신유승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테마파크의 특성상 대부분의 직원이 중세풍의 화사한 의상을 입고 있던 것과 달리 경호원을 연상시키는 복장이었다. 그러고 보니 귀 뒤로 이어마이크가 슬쩍 보였다. 아이들은 잠시 후에 보자는 말과 함께 손을 흔들며 공연 가이드 정희원이라는 명찰을 단 사람을 따라갔다. 김독자는 그 뒷모습을 멀거니 바라보다가 이내 자신의 자리로 향했다. 시계탑에서는 분침과 시침이 8시를 향해 달리고 있었다.

 

***

 

벌써 몇 병째인가. 한명오 부장은 제 앞에 놓인 생수병을 또 하나 비워냈다. 제 입이 바싹 마르거나 말거나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녀석은 여전히 무심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걸 보니 그간 테마파크 사업부와 연이 없었던 젊은 본부장을 구워삶아서 임원에 줄을 좀 대보자는 원대한 계획에는 상당히 차질이 생긴 듯했다. 그래도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것이 진정한 능력이라고 자신을 독려하며-물론 그 기회 중에는 사원들의 것을 가로챈 것도 상당하지만-계속 보고를 이어갔다.

 

부서원들을 몇 날 며칠 갈군 덕에 자료는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는 데다 사실 윗사람들은 아랫사람만 잘 뽑아서 굴리면 되는 것이니 보고는 이 정도면 충분할 것 같았다. 그런데도 저 잘생긴 젊은 상사의 미간은 도무지 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한명오는 등줄기에 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분명히 아침부터 업무 보고가 시작되었는데 창밖은 이미 황혼 후의 어스름만 남아있었다.

 

크흠, 이제 끝으로 서머 나이트 퍼레이드에 대해서 보고 드리겠습니다. 아시다시피 우리 스타 스트림에서 가장 인기 있는 퍼레이드로 손꼽히는 공연입니다.”

 

땀으로 번들거리는 한명오의 이마에서 시선을 돌린 유중혁은 팔짱 낀 손끝을 두드렸다. 테마파크인 스타 스트림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사무동의 중간층. 평일이라 조금 한적한 편이라 했으나 저녁임에도 불구하고 메인 스테이지 쪽에는 인파가 몰리는 것 같았다.

 

잠깐, 몇 시라고 했나?”

?”

나이트 퍼레이드.”

 

멍청한 표정의 한명오를 보며 한층 더 미간을 찌푸린 유중혁은 손에 들린 보고서를 빠르게 넘겼다.

 

“8시라, 이제 곧 시작이군. 그럼 직접 보는 편이 낫겠지.“

 

그 말에 한명오는 다시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퍼레이드 루트를 정리하는 움직임으로 분주한 것 같았다.

 

, 하하.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현장감을 느끼려면 그게 좋겠군요. 역시 젊으신 분이라 그런지 행동력이 대단하십니다.”

 

입에 침도 안 바르고 재빠르게 갖다 붙이면서 한명오는 상사의 눈에 보이지 않게 주의하며 사원들에게 손짓했다.

 

공연팀에 빨리 연락.’

 

그 짧은 사이에 젊은 본부장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먼저 가버린 모양이었다. 공필두 말마따나 재수탱이라고 궁시렁거리며 한명오도 허둥지둥 뒤를 따랐다.

 

***

 

고객 여러분께 안내 말씀드립니다. 잠시 후 8시에 서머 나이트 퍼레이드가 시작될 예정입니다. 퍼레이드는 30분간 진행되며, 그동안 일부 어트랙션의 운행이 중지되오니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또한, 퍼레이드가 끝날 때까지 이동이 제한되오니 이용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공연을 앞두고 분주하던 백스테이지에 미미한 긴장이 감돌았다. 김독자는 다시 한번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마른 침을 삼켰다. 차게 식는 손끝을 꾹꾹 누르며 머릿속으로 동선과 동작을 떠올려 보고 있었다.

 

가로등이 하나둘 꺼지기 시작했다. 그제야 낮보다 더 아름다운 스타 스트림의 밤이 찾아왔다. 공연 가이드들은 빠른 속도로 퍼레이드 루트를 따라 바리케이드를 치며 사람들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완전한 어둠이 내린 스타 스트림에, 드디어 커다란 괘종시계가 정각 8시를 알렸다.

 

빠른 걸음으로 움직였음에도 메인 스테이지 쪽은 이미 사람들로 가득했다. 어디에서 관람해도 큰 차이는 없을 듯하다는 생각이 들자 유중혁은 그 자리에 멈추어 섰다.

 

스타 스트림은 조금 전과는 완연히 다른 분위기였다. 어린아이도 아닌데 밝고 눈부신 동화 속 세상에도 밤이 찾아온다는 것이 새삼스러웠다. 짤랑짤랑 경쾌한 소리를 내며 여행하던 기차들이 걸음을 멈추고, 파스텔 톤으로 반짝이며 재잘대던 작은 성곽들도 푸른 어둠에 덮여 이야기를 멈추었다.

 

어쩌면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로 끝나는 동화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겨버린 세상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그런 상념에 빠져있던 찰나였다.

 

딸랑, 딸랑, 딸랑.

 

어둠을 가르는 희미한 종소리가 그에게 다가왔다. 소리의 근원을 향해 고개를 돌리니, 어둠 속에서 누군가가 걸어 나오고 있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몸을 감싼 검은 로브는 자그마한 별 같은 것들이 희미하게 깜박였다. 그는 사뿐사뿐 걸음을 내딛고는, 허공을 향해 둥그런 달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달은 어두운 세상에 홀로 남은 별인 양 연약하면서도 고고하게 빛을 흘렸다.

 

로브 아래로 살며시 드러난 가느다란 팔이 부드러운 곡선을 그릴 때마다 전등의 새하얀 빛이 궤적을 남겼고, 발끝이 살포시 세워질 때마다 별은 제게로 한 걸음 더 가까워졌다. 느릿하면서도 단정하게, 위태로우면서도 강하게. 단순한 동작이었음에도 담겨있는 감정은 그렇지 않아서. 별이 제 앞에 멈춘 순간, 그리고 처연히 빛나는 눈동자에 제 모습이 담긴 순간 중혁은 숨을 멈추고, 그 모습을 제 시야에 빠짐없이 담았다.

 

딸랑, 딸랑.

영원처럼 긴 찰나의 순간이 끝남을 알리는 것일까. 저도 모르게 손을 뻗고 뒤를 따르려는 것을 단단한 손이 막아섰다.

 

손님, 죄송하지만 안전을 위해 한 걸음 물러나 주십시오.”

 

공연 가이드의 말에 그제야 현실로 돌아온 유중혁의 뒤로 언제 왔는지 한명오가 허겁지겁 따라붙었다.

 

어허, 본부장님께 무례하게!”

", 본부장님입니까? 그렇지만 매뉴얼에는."

"됐네, 젊은 사람이 눈치 없기는. 가서 일 보게."

 

당황한 표정의 공연 가이드를 귀찮다는 듯 밀어낸 한명오가 미소 띤 얼굴로 유중혁을 바라보았다.

 

허어, 열심히 하다 보니 실수한 모양입니다. 그나저나 퍼레이드를 실제로 보신 적은 없으시다 하셨는데, 꽤 볼 만 하지 않습니까?”

 

돌아오는 답이 없었다. 그러나 상사의 낯빛을 살핀 한명오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

 

독자 씨, 여기요.”

 

저를 향해 손을 흔드는 유상아를 발견한 김독자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뭔데? 혹시나 해서 말하는데 내가 낀 거 아니거든?”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한수영이 김독자를 올려다보았다. 당황한 김독자가 해명을 요구하는 눈으로 유상아를 보았다. 그녀는 언제나처럼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 두 분 다 제가 부른 거예요. 서로 구면이시죠? 이쪽은 한수영 씨, 이쪽은 김독자 씨.”

상아 씨. 지난번의 답례로 저녁 사주시는 거라면서요.”

, 저도 그렇지만 한수영 씨도 독자 씨에게 고마워하고 있거든요.”

내가 왜?”

아까 독자 씨랑 정식 계약하고 싶다고 하신 게 누구였던가요?”

난 그런 말 한 적 없거든?”

어쨌든 이참에 두 분이 친해지면 좋겠네요.”

싫은데.”, “싫은데요.”

 

동시에 말해놓고는 기분 나쁜 듯 서로를 노려보는 두 사람을 재미있다는 듯이 바라보며 유상아가 말했다.

 

벌써 죽이 잘 맞네요?”

전혀요.”

에이. 그러는 독자 씨도 가까운 사람이 생기면 좋잖아요, 친구 없으시니까.”

 

뼈를 때리는 묵직한 돌직구에 김독자의 술잔이 비워졌다. 그 모습을 보며 킬킬거리는 한수영의 손에 유상아가 병을 쥐여 주었다.

 

두 분이 불편하실 수 있다는 건 알지만, 그래도 제가 아끼는 분들을 함께 만나고 싶었거든요.”

뭐하냐 너, 잔 비어있는 거 안 보여?”

지난번 부터 물어보고 싶었는데 넌 왜 초면부터 반말이세요?”

꼬우면 너도 반말하든가.”

 

뻣뻣한 자세로 잔을 부딪치는 두 사람을 보며 유상아는 흐뭇하게 미소를 지었다. 왁자지껄한 소음에는 세 사람의 목소리도 한몫하고 있었다. 달이 밤하늘을 가로지르는 동안 세 사람의 앞으로 초록 빛깔의 병이 쌓여만 갔다.

 

***

 

유중혁은 서류에 적힌 글자들에 집중했다. 아니, 집중하려 노력했다. 테마파크 사업부로 옮겨 온 지도 벌써 한 달. 인사 발표 이후 공식적으로 부서 이동이 이루어지기 전까지 그는 국내외의 유명 테마파크를 답사하며 스타 스트림의 개선점을 찾았다. 국내 최고(最古)의 테마파크인 스타 스트림은 그 유구한 역사만큼이나 아직 업계 최고의 입지를 유지하고 있었으나 그것이 한편으로는 약점이기도 했다. 낡고, 오래되고, 바랜 것들. 물론 향수를 자극하는 요소이기는 했지만, 이제는 새로움을 추구할 필요도 있었다.

 

그래서 그가 대표로서 가장 먼저 시도한 것은 노후화된 놀이기구를 대대적으로 철거하고 보수하는 일이었다. 이 과정에서 해외 유명 테마파크의 어트랙션을 설계한 아일렌 메이크필드를 어렵게 영입했다. 그에 대해 본사에서 뼈가 굵은 공필두 부장이 크게 불만을 표했으나 승진을 시켜주자 순식간에 잠잠해졌다. 공필두의 기용은 애초부터 염두에 둔 것이었다. 국내외에서 기술적인 부분에는 최고 권위자인 두 사람이 있으니 리모델링이 끝나면 어트랙션 쪽은 문제없을 것이다. 그 외에 F&B(Food and Bread) 분야라면 애초에 유중혁 자신이 외식사업부 출신이므로 말할 것도 없었고, 다른 부서들도 적재적소에 인재들을 배치했다. 남은 문제는 테마파크의 꽃이라는 공연팀이었다.

 

‘Star-Stream season 2 : 빛과 어둠의 계절

 

그는 표지에 적힌 글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리모델링이 끝나고 재개장을 하는 날에 맞추어 대대적으로 새로운 공연을 시작할 예정이었다. 총감독은 당연하게도 한수영이었다. 공연팀에 시나리오 작가로 입사한 그녀를 공연팀의 수장으로 앉힌 것에 대해서 뒷말은 많았으나 한수영은 특유의 카리스마와 강단으로 순식간에 사업부를 평정했다. 그만한 능력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니 당연하게도 무엇 하나 흠잡을 구석이 없이 일사불란하게 진행되어야 할 것이고, 그렇게 되고 있기도 했다.

 

국내외의 유명하다고 손꼽히는 퍼레이드를 죄다 관람한 결과, 세간의 평가와 마찬가지로 유중혁 또한 스타 스트림의 기존 나이트 퍼레이드도 어디 가서 뽐낼 만하다고 생각했다. 물론 기획이나 연출이 더욱 뛰어난-물론 한수영은 그런 소리 할 거면 예산이나 더 내놓으라고 하였지만-공연도 있었고, 외관상 더욱더 화려하고 독창적인 공연도 많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날 느꼈던 가슴 벅찬 감동은커녕 그 어떠한 감상도 느낄 수 없었다.

 

그러면 스타 스트림의 퍼레이드는 매번 감동적이었나 하면 또 그렇지도 않았다. 귀국하자마자 집에 들르지도 않고 퍼레이드 시간에 맞추어 달려갔으나 오히려 다른 공연만 못 했던 것이다. 어떠한 신비로움도, 황홀함도 느낄 수 없는. 그날따라 무언가에 홀리기라도 한 것인지, 유중혁은 안달이 나있었다. 알지도 못하는 낯선 이의 모습이 왜 이다지도 그리운 것인지.

 

***

 

간단히 자기소개하시죠. , 그럼 준비하신 장기자랑을.”

 

수 십 번째 똑같은 멘트를 하며 비형은 자신이 녹음기가 된 것 같다고 생각했다. 하루에도 수십 명에 달하는 오디션 참가자들을 몇 주째 보고 있자니 이제 그들의 입장이야 제 알 바 아니었다. 다 거기서 거기, 특별히 새로운 사람도 없고 관심이 가는 이도 없었다. 당연하다면 당연할 일이었다. 사실 퍼레이드 연기자에 대단히 뛰어난 재능을 요구할 필요도 없고 적당히 컨셉에 맞으면 그만이니까. 그래서 비형은 작금의 상황에 대해 상당히 곤혹감을 느꼈다.

 

감독님, 이렇게까지 해야 합니까? 이건 시간 낭비에 인력 낭비입니다.”

난들 아냐? 위에서 까라는 대로 까야지. 유중혁 그 새끼, 하여간 이상한 데에 꽂혀서.”

 

남들이 들으면 식겁할만한 말을 중얼거리며 한수영은 레몬 사탕을 까드득 깨물었다.

 

감동을 주어야 한다잖아, 가암도옹. 감동은 무슨 얼어 죽을. 어디서 번지수는 잘못 찾아서.”

 

말은 그렇게 하지만 사실 한수영도 어느 정도는 동의하고 있었다. 제대로 된 으리으리한 무대가 아닌 길바닥에서 이루어지는 공연이라 할지라도 그 바탕은 자신이 쓴 시나리오이다. 자신의 의도를 완벽하게 구현해낸 공연이란 모든 작가의 꿈이 아닐까. 그리고 한수영은 특별히 이번 시나리오에 애착이 있었다.

 

빛과 어둠의 계절.’

장르로 따진다면 동화보다는 환상 문학에 가까운, 몽환적이면서도 화려한 분위기를 컨셉으로 삼았다.

 

세상은 진즉 멸망하여 깊은 어둠 속에 잠겨 있었다. 희망이라는 것은 안타까울 정도로 연약한 빛만을 깜박일 뿐이었다. 그러나 그 작은 빛이 바로 구원의 실마리였으니.’

 

뻔한 클리셰다. 그리고 클리셰를 그대로 쓰는 작가는 없다. 심지어 클리셰를 비트는 기술조차 뻔해져서, 그마저도 클리셰라 해야 할 지경인 마당이니까. 그래서 한수영은 나름의 방식을 택했다.

 

동화라면 대체로 어둠의 중심에 마왕이 있고, 이를 몰아내는 것이 용사의 역할이다. 그러나 자신의 시나리오에서 어둠을 몰아내는 것은 마왕이었다.

 

마왕, 근원부터 어둠에서 태어난 자. 아득한 어둠에서 태어났기에 모든 것을 자신의 심연 안에 품어낼 수 있는, 가장 깊고 안락한 어둠. 그리고 어두운 것에서는 모든 것이 밝게 보이는 법이다. 사물과 지면이 맞닿는 가장 어두운 곳에 오히려 반사광이 생겨나듯, 어둠을 대면하는 그는 가장 깊은 어둠이기에 빛이기도 했다.

 

아무튼 문제는 어둠이자 빛이고, 절망이자 구원인 그 캐릭터를 연기할 배우가 마땅치 않았다. 벌써 몇십 년을 함께한 배우들을 대상으로 한 내부 오디션에서도, 그러다 찾지 못해 어쩔 수 없이 진행한 외부 오디션에서도 도무지 성에 차는 배우가 없었다.

 

까놓고 말하자. 나도 작가의 자존심이 있긴 하지만, 이게 연극판은 아니잖아. 여기가 무슨 충무론 줄 알어?”

 

한수영은 인기척을 느꼈음에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누군지 뻔하다. 아무리 사업부의 대표로 의욕이 넘친다지만 퍼레이드 댄서 오디션에 본부장이 직접 나서는 일은 스타 스트림의 역사상, 아니 모든 테마파크의 역사를 합쳐 봐도 없을 것이다.

 

네 똥고집 때문에 지금 연습은커녕 여태 오디션만 하고 있잖아. 재개장이 코앞인데 퍼레이드 없이 가시게?”

그럼 너는 뻔한 공연에 만족할 생각인가?”

 

한수영은 다시 레몬 사탕을 깨물었다. 대학 동기만 아니었어도 진짜.

 

다음 주 오디션이 진짜 마지막이다. 그때도 네 성에 차는 놈 못 찾으면 포기해. 아니면 재개장을 연기하시든가. 난 할 만큼 했어.”

 

고개를 살짝 까딱이고는 뒤돌아서는 그를 향해 한수영은 가운뎃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아주 저만 잘 났지, 싸가지 없는 새끼. 부글거리는 속을 달래려 그녀가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 유상아, 퇴근 몇 시? ]

 

그러나 잠시 후, 포장마차에서 한수영과 잔을 맞대는 것은 전혀 엉뚱한 사람이었다.

 

***

 

내가 진짜 그 새끼 때문에 돌겠다니까. 말을 해도 쳐 듣지를 않아요. 그 새끼 똥고집이 하루 이틀이었느냐 마는. 아오. . 그게 상사만 아니었어도.”

 

빠르게 비워지는 잔을 다시 채워주며 김독자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사람 사는 게 다 거기서 거기라더니, 정규직에 직급이 높아도 회사 생활이 어려운 것은 매한가지인가 보다.

 

리모델링인가 뭔가 한다더니 어째 너도 그렇고 상아 씨도 그렇고 더 바쁜 것 같네.”

그러는 너희 회사는 신작 런칭하는 것 같던데, 넌 어째 재깍재깍 연락된다? 설마 잘렸냐?”

비슷하지.”

 

김독자는 어깨를 으쓱했다. 이번 주면 미노 소프트와의 계약이 만료된다. 그런데 여태 재계약에 대한 언지가 전혀 없는 걸 보면 상황을 알 만했다. 계약직 짬밥이 얼만데, 그 정도 눈치야. 그래서 얼마 전부터 회사에서는 틈틈이 짐을 정리하면서 인수인계 자료를 준비했고, 퇴근 후에는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작성하며 밤을 지새우는 나날을 보내는 중이었다.

 

, 김독자. 이제 계약직에서 백수로 전업?”

취업시켜줄 거 아니면 조용히 해.”

 

까르르 웃던 한수영이 갑자기 고개를 들이밀었다.

 

그러게 말했잖아. 정말 너 우리 회사 생각 없어? 곧 공채니까 원서 넣으라고 몇 번을 말했냐.”

되겠냐.”

 

김독자는 자신의 이력서를 떠올렸다. ‘전공 때려 치고 뒤늦게 다시 수능을 본 결과 지방대 졸업, 그 후 보잘것없는 경력 따위를 쌓으며 나이만 먹음.’ 테마파크인 스타 스트림을 비롯해 다양한 분야를 독점하고 있는 굴지의 대기업인 성류같은 곳을 지원하기엔 과하게 양심 없는 스펙이다. 그러니 어차피 바로 탈락할 것이 뻔한데 서류를 준비하고 발표를 기다리는 것 따위의 수고를 하고 싶지는 않았다. 떨어질 게 뻔한 걸 알면서도 희망 고문 당하는 것도 싫고.

 

아니 꼭 스타 스트림이 아니어도 성류에서 관심 있는 계열사 없어?”

됐고.”

왜 튕기는데. 설마 백수에서 노숙자로 전업하실?”

이모! 여기 닭똥집 추가요.”

아니, 진짜로.”

됐다니까 그러네. 정말 도와줄 생각이면 알바 자리나 알아봐 주든지.”

 

자신이 한수영이나 유상아처럼 대단한 사람이 아닌 것은 익히 잘 알고 있었다. 그걸 굳이 시간과 노력과 감정을 소모해가며 확인받고 싶지 않다는 뜻이다.

 

그 정도야 뭐, 캐스트 자리야 자주 있으니까. 너 원하는 팀 있냐? 공연 쪽 지원할 거면 유상아가, 잠깐.”

 

따끈하게 잘 구워진 닭똥집을 집으려던 한수영의 젓가락이 갑자기 멈추었다.

 

뭔데.”

미친, 내가 왜 널 생각 못 했지?”

 

무언가 깨달은 듯한 표정의 한수영을 보며 김독자는 눈을 끔벅거렸다.

 

그러니까 뭐냐고?”

 

***

 

재앙은 그로부터 일주일이 지난날, 스타 스트림 공연 연기자 오디션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내가 지금 뭘 하는 건지. 거울을 보며 오징어처럼 흐느적거리는 김독자를 못마땅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한수영이 결국 뒤통수를 후려쳤다.

 

백수로 굶어 죽기 싫으면 똑바로 하랬지.”

 

그러자 거울 앞에서 정신없이 서성이던 김독자가 푹 꺾였던 고개를 들고 억울한 표정으로 한수영을 바라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닌 것 같다. 너도 상아 씨도 너무 쉽게 생각하는데, 나 무용 관둔 지 오래야.”

 

그 말에 한수영이 기가 찬다는 듯이 웃었다.

 

보자 보자 하니까 정말. , 쉽게 생각하는 건 너 아냐?”

?”

 

레몬 사탕이 까드득 소리를 내며 부서졌다.

 

누가 너한테 제발 무대에 서 달랬냐? 존나 고인 물처럼 구는데, 네가 이쪽 판에 대해 뭘 아는데?”

 

벙찐 김독자를 향해 아주 벼르고 있었다는 듯 한수영이 계속 쏘아붙였다.

 

아주 오디션 보기만 하면 철썩 붙을 것처럼 구는데, 그러다 떨어져서 개망신당하면 어쩌시려고?”

 

뒤통수를 맞은 것은 한참 되었는데, 뒷머리가 다시 얼얼한 것 같았다. 말문이 막힌 김독자를 보며 한수영이 한숨을 내쉬었다.

 

기왕 하는 거 제대로 해, 김독자. 잘 되면 몇 달은 먹고살 걱정 없으니 너도 좋은 거 아냐?”

그건 그렇지.”

 

여전히 탐탁잖은 표정의 김독자를 일별한 한수영은 터벅터벅 걸어가더니 문을 열어젖혔다. 손이 많이 가는 새끼. 아주 입에 떠먹여 줘야 한다니까. 인상을 잔뜩 쓰며 김독자의 엉덩이를 발로 걷어찼다.

 

, 뭐 하는, 우악!”

수고.”

 

문 너머의 세계를 향해 볼품없이 나뒹구는 김독자를 비웃으며 한수영이 문을 닫아버렸다.

 

이런 식으로 입장하는 참가자라니. 심사 위원에게 아주 참신한 인상을 주었을 것이다. 볼에 닿은 바닥의 한기에 몸서리를 치며 김독자는 생각했다. 전 계약직이자 현 구직자 김 모 씨, 이곳에 잠들다. 청년 실업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이 사건은. 그렇게 현실도피를 시도했으나 결국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도무지 이 망해버린 상황을 헤쳐나갈 방도가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니 빨리 끝내버리고 나가자는 결론을 내렸다. 두고 보자, 한수영.

 

안녕하십니까. 김독자라고 합니다. 나이는 스물여덟, 게임회사 직원이었고 웹 소설 읽기가 취미입니다. 관련 경력은 없습니다.”

 

시작부터 글러 먹은 오디션이니 될 대로 되라는 마음이었으나 도저히 고개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이쯤 되면 그만 나가라고 하지 않을까 기대하며 시선만 살짝 올렸다. 예상대로 심사위원들의 표정은 한결같이 얼어붙어 있었다. 한수영의 말이 복선이었던 것일까, 진짜로 개망신 엔딩을 맞이하고야 말았다는 사실이 뼛속 깊이 느껴졌다. 잠깐. 그러고 보니 한수영 그 자식, 설마 이렇게 개망신시키는 것이 목적이었던 건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문밖에서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 기분이다. 젠장, 한수여어어어어어어엉.

그러는 동안 이력서와 자신의 얼굴을 몇 번 번갈아 보던 심사위원이 입을 열었다.

 

김독자씨? 장기자랑 준비하셨죠?”

, .”

 

***

 

당신이 구원의 마왕인가요?”

배역으로 부르지 말아 주십시오.”

 

한 번만 더 저따위로 불렸다가는 정말 수치사해서 마른오징어가 되어버릴 것 같았다. 누가 지었는지는 몰라도 세기말 느낌을 가득 담은 미쳐버린 중2 감성이다. 김독자는 몸서리가 나는 것을 감추며 말했다.

 

그래서, 무슨 일이십니까?”

어머, 보기보다 까칠하네요. 그런 것도 나름대로 매력적이긴 하지만.”

죄송하지만,”

용건이 있는 건 맞아요. 공연 팀 내부에서도 이번 오디션은 상당히 이례적이라 모두 관심을 두고 있었거든요. 그래서 호기심이 들었다 할지.”

 

그 말에 김독자는 지나쳐가려던 몸을 틀어 상대방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큰 키를 돋보이게 하는 검정 드레스가 잘 어울리는 외국인 배우. 얼핏 30대 정도로 보이지만 한수영이 지나치듯 말했던 것이 떠올랐다. 페르세포네. 남편과 함께 공연팀 초창기 멤버 중 한 사람이라 했다.

 

그런데 관심이라는 것이 언제나 우호적인 방향으로 작용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겠지요.”

 

친근하게 굴고 있었음에도 은근한 연륜과 아우라가 묻어나고 있었다. 김독자는 괜한 긴장감에 침을 꿀꺽 삼켰다. 그것을 눈치챘는지 페르세포네는 화사하게 웃어 보였다.

 

사람이 오래 모여 있으면 파벌이 생길 수밖에 없는 법이거든요. 오래 일할 생각이라면 어디든 붙는 편이 좋을 거예요.”

싫다면요?”

후후, 그럼 난 어때요? 우린 당돌한 사람을 좋아하거든요.”

어차피 여기서 오래 일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런가요? 그래도 아쉬울 땐 찾아와요. 분명 그렇게 될 테니까.”

 

김독자는 경계심 가득한 눈으로 페르세포네를 바라보았다. 그것이 더욱 흥미를 끄는지, 페르세포네는 한층 더 즐거운 표정을 지었다.

 

***

 

호의인지 악의인지 의도를 알 수 없는 그 경고는 어쩌면 예고였는지도 모른다. 간단한 교육이 끝나고 본격적인 연습이 시작되면서 김독자는 그녀의 말을 절감하게 되었다.

 

주연께서는 오늘은 맨발로 리허설하실 모양이야?”

역시 되는 놈은 뭐가 달라도 다르네.”

 

김독자는 거울 속을 차가운 눈으로 일별하며 제 뒤로 기분 나쁜 웃음을 흘리는 놈들을 헤아렸다. 예상대로 올림포스, 파피루스, 베다, 그리고 황제.

 

외국인 배우들이 워낙에 많다 보니 공연팀에는 인근 국가 출신들끼리 파벌을 이루는 경우가 많았다. 이들은 텃세를 부려 기존 배우를 쫓아내면서, 한편으로는 오디션 과정에서 입김을 넣어 자국 출신 배우들이 팀에 들어올 수 있도록 했다. 그리고 당연히 김독자는 그들의 배척 대상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한 가지 간과한 것이 있다면, 김독자는 여러 가지 이유로 타인의 불필요한 관심과 악의에 대단히 익숙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또한 다년간의 계약직 생활을 통해 배운 것이 상대방의 복장을 터뜨리는 기술이라는 특이사항도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특성들은 이럴 때 빛을 발했다.

 

사물함 속에 쓰레기가 들어있거나, ‘우연히발이 걸린다든가, 좁지도 않은 복도에서 어깨를 부딪치는 바람에 들고 있는 물을 쏟는 일 따위에 김독자는 눈 하나 깜빡하는 일이 없었다. 덧붙여 또한 그 쓰레기를 버린 것으로 추정되는 사람의 사물함에 F&B팀에서 얻어온 음식물 쓰레기-한여름이라 곰팡이가 새하얗게 피어있는-를 넣어둔다거나, 제 발목에 걸렸던 발을 실수로자근자근 밟아준다거나, 물이 쏟아지기 직전에 상대방에 뿌려준다거나 하는 식으로 갚아주곤 했다.

 

물론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무슨 소리야? 너희들이 내 신발이라도 빨아보고 싶어서 가져갔으면서. , 그런데 신발이 두 짝이라 어쩌지? 아쉬우면 발가락이라도 빨아보든가.”

 

서늘한 얼굴로 오만하게 고개를 꺾고 도발하자 킬킬거리는 소리가 잦아들었다. 파벌에 속하지 않은 녀석 중 하나가 우물쭈물 슬리퍼를 가져다주었지만, 이걸 신을 수는 없었다. 녀석들의 유치한 행동에 자신이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줘야 했기 때문이다.

 

김독자는 슬리퍼를 든 채 무리의 중심에서 웃고 있는 남자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베다라 불리는 무리의 수장이라 할 수 있는, 인드라.

 

신겨달라는 건가?”

아니, 그럴 리가.”

 

그의 앞에 한 뼘 정도 떨어진 곳에 멈춰선 김독자는 한동안 인드라를 빤히 바라보았다. 몇 초 정도 시간이 흘렀을까. 인드라가 입술을 비죽이 올리며 무언가 말을 하려는 순간, 김독자의 슬리퍼가 인드라의 머리를 후려졌다. 급작스러운 공격에 인드라가 휘청거리며 넘어지는 것을 놓칠세라 김독자가 그 위를 깔고 앉았다. 그리고 슬리퍼가 인드라의 얼굴에 자비 없이 휘둘려졌다.

 

! , 잠깐!”

 

그 누구도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당황해 아무도 움직일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 사이 성에 차도록 인드라를 흠씬 두들겨 팬 김독자가 만족스러운 얼굴로 몸을 일으켰다. 제 발치에 널브러진 그를 싸늘하게 내려다보며 김독자가 입술을 한쪽으로 끌어 올렸다.

 

좆 같이 굴면 좆 되는 것도 알아야지, 새끼야.”

 

김독자는 인드라의 얼굴에 슬리퍼를 툭 내던지고는 휘적거리며 연습실로 향했다.

 

***

 

몇 번의 기행 끝에 김독자는 이 구역의 미친놈으로 인정을 받았다. 혼자인 거야 워낙에 익숙하지만 이렇게 대놓고 텃세를 부리며 배척하는 것은 오랜만인지라 오히려 신선한 맛이 있었다. 물론 그게 좋은 의미는 아니었다. 놈들 앞에서 아무렇지 않은 듯이 굴 수는 있지만 정말로 괜찮은 것은 아니니까. 특히나 오늘처럼 몸도 피곤한 날에는 더욱.

 

네 놈이 들어온 후부터 매일 시끄럽다.”

먼저 시비를 거는 데 어쩝니까?”

 

덩그러니 앉아있는 뒤로 자그마한 인영이 나타났다. 어느새 제 옆에 왔는지 머리 위에서 시선이 느껴졌지만 김독자는 여전히 지친 눈을 발가락으로 향한 채 꼼지락거릴 뿐이었다.

 

못난 놈. 그 정도로 네 놈이 만만하다는 게다.”

제가 뭘 잘못했는데요? 그렇게 말씀하시니 서러워서 못 살겠습니다.”

 

툴툴거리는 김독자의 머리 위로 단호하지만 따스한 음성이 내려앉았다.

 

어리석은 자들처럼 굴지 말아라. 네 녀석이 그 자리에 어울리는 인물임을 증명하면 될 일이니.”

알고 있습니다.”

알고 있으면 아는 녀석답게 굴어라. 네 놈이 바퀴벌레만큼도 재능이 없는 것은 알고 있지만 그래도 근성은 쓸 만하지 않느냐.”

 

김독자는 고개를 들어 키리오스를 바라보았다. 언제나 시선을 내려야만 볼 수 있던 그를 올려다본 것은 처음인 것 같았다. 어릴 때도 누군가 이렇게 자신의 곁에 서서 내려다 봐주었다면 어땠을까.

 

어디 가는 게냐?”

뭐긴요? 퇴근입니다.”

실력이 구리면 노력이라도 제대로 해야 할 거 아니냐?”

초과근무 수당 줄 것도 아니잖아요. 내일 뵙겠슴다.”

 

쥐새끼 같은 놈이라며 역정을 내는 키리오스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김독자는 짐을 챙겼다. 제자랍시고-사실 왜 저만 제자라고 부르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챙겨주는 것에 마음이 조금 풀리긴 했지만, 남아서 연습씩이나 할 기분은 아니었으니까.

 

물먹은 솜처럼 축 처지는 몸을 질질 끌며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콩나물시루 같은 지하철이 흔들릴 때마다 흐느적거리고 있자니 속까지 울렁거리는 것 같았다. 기분도 영 별로인데 차라리 밤바람을 쐬며 걷는 것이 나을 듯싶어, 결국 평소보다 한참은 일찍 내려버렸다. 그래도 아직 한여름은 아니라고, 밤공기는 적당히 시원해서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맥주 한 캔이 있으면 딱 좋을 텐데. 그래서 마침 보이는 편의점을 향했다.

 

***

 

여동생으로부터 온, 동그라미 두 개만 적혀있는 메시지를 보며 유중혁은 옅게 웃었다. 제 뒤를 졸졸 따라다니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저도 나름대로 바쁜 모양인지 대화가 점점 짧아졌다. 자신의 도움 없이도 많은 것들을 스스로 할 수 있게 되는 동생을 보고 있자니 기특하기도 했지만 한 편으론 서운하기도 했다. 물론 그런 내색을 보이면 유미아는 눈을 가늘게 뜨고 오빠도 이젠 나한테서 독립을 해야 한다며 타박을 했다. 틀린 말은 아니다. 공연히 뜨끈한 닭 국물에 무림 만두 생각이 나기에 유중혁은 익숙한 방향으로 차를 돌렸다.

 

만두 하나, 닭 국물도.”

드시고 가세요?”

포장입니다.”

 

본디 음식이란 그 자리에서 먹는 것이 가장 맛있다. 그러나 번화가에서 떨어진 골목에 위치한 작은 식당의 몇 안 되는 테이블은 오늘따라 가득 차 있었다. 봉투를 받아 쥔 유중혁이 손잡이에 힘을 주자 출입문 위쪽 모서리에서 작은 종이 딸랑거리며 작별 인사를 건넸다. 등 뒤로 흔들리는 문이 신경 쓰이기에 제대로 닫히도록 붙잡았다. 그러고 나서야 등을 돌리니 편의점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문득 생수가 떨어졌다는 것이 생각났다. 오늘은 장을 볼 예정이 없으니 아쉬운 대로 2L짜리 한 병만 사 갈 요량으로 유중혁은 발걸음을 옮겼다.

 

개애애애 잘 생겼다아.”

 

편의점 앞에 놓인 테이블 사이를 지나던 유중혁은 무례한 말에 미간을 찌푸렸다. 멈칫한 사이 등 뒤로 한 마디가 더 얹어졌다.

 

연예인? 잘 생겨서 조오켔다, 새꺄.”

 

무림 만두를 먹을 생각으로 풀어졌던 기분이 급격히 나빠지는 것을 느끼며 유중혁은 고개를 돌렸다. 먼지가 잔뜩 쌓인 파라솔 그늘에 웬 비쩍 마른 주정뱅이가 테이블에 고개를 처박을 듯이 중얼거리고 있었다. 시비를 거는 게 아니라 단순한 술주정인 모양이었다.

 

상대할 가치가 없군.”

이야. 목소리까지 좋네에.”

 

남자는 기가 찬 유중혁의 일갈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주정뱅이를 상대해봤자 시간 낭비일 뿐이기에 유중혁은 눈썹을 한 번 꿈틀하고는 지나치려 했다. 그러나 주정뱅이가 고개를 든 순간, 겹쳐지는 장면에 발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창백할 정도로 하얀 얼굴이 술기운에 붉게 물들어 있었다.

 

가까이서 보니까 더 잘 생겼네.”

너는.”

 

저도 모르게 다가가서 멱살이라도 쥘 기세로 손을 뻗은 유중혁은 이내 제가 하려던 행동을 깨닫고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그러는 동안 적당히 풀린 눈동자가 자신을 향해 끔벅거리고 있었다. 일순 정적이 흘렀다.

 

꾸르륵.’

. , 저녁 안 먹었나 보다.”

 

제가 말해놓고도 멍청한 소리인 것을 아는지 남자는 히죽거리며 자신의 홀쭉한 배로 시선을 옮겼다. 휘적거리는 손으로 꾸르륵거리는 배를 누르며 킬킬거리더니 그만 테이블에 머리를 콩 찍고 말았다. 어이없는 모습에 유중혁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한편으로는 괜히 손에 들린 것이 무겁게 느껴져, 비닐봉지를 자그마한 머리통 앞에 던지듯 내려놓았다.

 

먹어라.”

 

그 말에 고개를 들어 올린 남자가 멀뚱히 자신을 바라보았다. 유중혁은 이를 으득 갈고는 비닐봉지를 뒤져 나무젓가락을 들이밀었다. 그러자 남자는 고개를 몇 번 갸웃거리더니 이내 허옇게 웃었다.

 

왜애?”

꼴을 보니 밥맛이 떨어져 못 먹겠군. 안 먹을 거면 버려라.”

수상한 데에. 그래도 장기 털릴 만큼 튼튼한 편은 아니긴 하지마안.”

날 장기나 파는 놈 따위로 취급하는 건가?”

 

그렇게 말을 하긴 했지만 오해할 법한 상황이긴 했다. 일면식도 없는 사람이 갑자기 음식을 나눠준다니. 특히 자신의 성격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예를 들면 한수영 같은-기겁할 일이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한동안 자신을 응시하던 남자는 무언가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뭘 팔 거면 셀카 파는 게 제일 돈 되겠네. 뉘신 진 모르겠지만 자알 먹겠슴다.”

 

원래 성격이 그런 건지, 아니면 취해서 저러는 건지. 유중혁이 어이없어하거나 말거나 남자는 힘없이 흐느적거리는 손가락으로 만두를 입안에 욱여넣으려 했다. 양 볼에 커다란 무림 만두를 한껏 쑤셔 넣고는 우물우물 씹는 게 꼭 햄스터 같았다. 그래서 유중혁은 다소 맥락 없어 보이는 문장을 뱉어내었다.

 

나는 유중혁이다.”

 

그 말에 잠시 넋 나간 표정으로 뭐라고 웅얼거린 남자는-아마 이름도 잘 생겼네정도인 것 같았으나-주머니에서 무언가를 찾기 시작했다.

 

아응 곡가야, 깅곡가.”

무슨 소린지 도무지 모르겠군. 삼키고 말해라.”

앙깡망.”

 

그는 계속 주머니를 뒤적거렸으나 원하는 것을 찾지 못한 모양이었다. 결국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는 무언가 설명하려다, 만두가 목에 걸렸는지 캑캑거리기 시작했다. 재빨리 닭 국물을 먹이자 그제야 숨을 제대로 쉬고는 말했다.

 

나는 독자야, 김독자. 미노 소프트 계약직 직원인데 명함이 없네에. 왜 없어? 맞다, 나 잘렸어.”

미노 소프트라면. 게임 회사 말인가?”

. 거기이.”

댄서가 아니었나?”

댄서? 땐스, 때앤스, ! 자식, 너 뭘 좀 아는 새끼구나아. 이래 봬도 형이 소싯적엔 어? 티비에도 막 나오고. 그런데 다들 무시나 하고 말이야아. 시발 새끼들.”

 

흐느적거리며 열심히 설명하던 김독자의 얼굴이 급격히 차가워졌다. 실실댈 때는 마냥 보기 좋은 얼굴이었는데, 다른 사람으로 착각할 정도였다. 내심 놀라긴 했지만 일단은 자신의 의문을 해결해야 했다.

 

스타 스트림에서 공연하는 걸 봤다.”

, 그날! 땜빵 했어. 유상아 씨한테 낚여가지고오.”

그래서 보이지 않았던 거군.”

 

매일같이 퍼레이드를 챙겨보았음에도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던 이유가 드디어 해결되었다. 그럼 이제 더 볼 수 없는 건가? 괜히 다급해진 마음에 가느다란 손목을 붙들었다.

 

요즘은 어디서 뭘 하고 있지?”

? 요즘 뭐하지? 아아. 이제는 한수영한테 낚여가지고오.”

한수영과도 아는 사이였군.”

 

유상아에 이어 한수영까지. 이렇게 조금만 손을 뻗으면 닿을 수 있는 곳에 있었다는 사실에 조금 화가 났다.

 

, 너 상아 씨랑 한수영을 어떻게 알아?”

대학 동기다.”

동기이? 그럼 셋이 친구야?”

 

딱히 틀린 말은 아니지만, 친구라는 말은 조금 어색했다. 별로 셋이 어울려 다닌 것도 아니었고, 정확히 말하면 자신은 타인에게 특별히 관심을 두거나 마음을 쓰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적당히 지인 정도라 하면 될까. 같은 회사에 입사한 후로는 약간의 동료의식 같은 것을 느끼고 있는 것도 사실이니 동료가 나을지도.

 

그렇게 유중혁이 어떻게 답할지 고민하는 동안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던 김독자가 갑자기 손뼉을 치기 시작했다.

 

그럼 너랑 나도 친구네?”

그건 무슨 헛소린가?”

유상아 씨가 그랬어, 다들 그런 식으로 친구가 되는 거라고. 나는 친구가 없어봐서 잘 모르겠지마안, 상아 씨 말은 틀린 적은 없으니까.”

 

만면에 미소를 가득 담은 김독자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흐느적거리며 유중혁에게 다가갔다. 코앞에서 휘청이는 것을 다급히 허리를 붙잡아 일으키자 또 히죽거리며 웃어댔다. 이제 완전히 나가떨어졌는지 자신의 어깨에 매달려 고개를 떨궜다. 그 바람에 따스한 숨결이 귓가에 닿아, 유중혁은 그만 아찔해졌다.

 

김독자, 뭐 하는 건가.”

뭐긴 뭐야아, 전우애다.”

제대로 취했군. 안 되겠다. 집은 어디지?”

몰라. 없어, 그런거어.”

 

눈을 감은 채 무어라 중얼거리기 시작하는 것에 유중혁은 또 한숨을 쉬었다. 언뜻 듣기에 피카츄 어쩌고 하면서 노래를 부르는 모양이다. 인상을 찌푸리며 김독자를 어깨에 들쳐 메다시피 하고는 자신의 차로 향했다. 조수석에 흐느적거리는 몸을 던져 넣고 안전벨트를 채운 후, 주소를 물어볼 요량으로 한수영에게 전화를 걸었다.

 

서로 생긴 모습은 다알라도오. 우리는 모두 치인구. 피카~.”

 

신호음이 울리는 동안 유중혁은 눈을 감고 여전히 알 수 없는 노래를 흥얼거리는 김독자를 내려다보았다.

 

한심하군.”

 

그러나 이상하게도 자꾸만 웃음이 나왔다.

 

***

 

핸드폰을 바라보며 비실비실 웃던 김독자의 얼굴로 키리오스의 매서운 시선이 꽂혔다. 그래서 김독자는 재빨리 내려놓는 척하며 손으로 빠르게 화면을 눌렀다.

 

[ 연스ㅂㄲ 슴스닝 빷침 ]

[ 알았다. 끝나고 연락해라. ]

[ ㅇㅇ ]

 

몇 시간 후, 드디어 연습이 끝나자 김독자는 서둘러 핸드폰을 확인했다. 대체 뭐라고 쓴 거야? 화면을 보지 않으니 저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오타가 난무했으나 유중혁은 용케도 알아본 모양이다. 잘생긴 자식이 다정하기까지 하다니. 대체 우리 중혁이는 부족한 게 뭘까?

 

[ 나 이제 끝나서 나가고 ]

 

늦었군, 김독자.”

, 어떻게 알았어?”

네 놈 퇴근하는 시간이야 늘 똑같지 않나.”

그랬나.”

 

하긴, 공식 연습 시간이 끝나자마자 칼같이 퇴근했으니 매일 같은 시간이긴 했다. 머쓱하게 목덜미를 문지르며 김독자는 유중혁을 올려다보았다.

 

그런데 중혁아, 너희 부서도 바쁘긴 진짜 바쁜가 보다. 너야말로 맨날 이 시간에 퇴근이지 않냐?”

이 시간에 나가야 차가 막히지 않는다.”

하긴 일찍 나가봤자 차 막히면 다 소용없지. 덕분에 편하게 퇴근하니 나야 좋네.”

 

그 말에 유중혁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편의점에서의 만남 이후로 그는 자연스럽게 김독자의 친구가 되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김독자가 그렇게 생각했다는 것이다.

 

김독자는 아무것도 몰랐다. 유중혁이 사업 운영팀 쪽에 있는 것 정도만 알 뿐, 그가 스타 스트림의 대표이고 때때로 집무실의 통유리 너머로 공연팀이 연습하는 모습을 내려다본다는 것도. 일부러 공연팀 연습이 끝나는 시간에 맞추어 퇴근한다는 것도. 김독자를 데려다주기 위해 집까지 가는 길을 조금 돌아서 간다는 것도.

 

모르길 바랐지만, 언제까지고 모르길 원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유중혁은 기회를 헤아리는 중이었다.

 

이제 다음 주인가.”

그렇군.”

 

공사 중임을 알리던 시설물과 표지판들이 하나 둘 씩 사라지고 낡았던 놀이기구들이 깨끗이 단장한 채 준비가 다 되었음을 알리고 있었다. 유중혁은 아일렌과 공필두를 기용하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 솔직히 좀 긴장된다.”

공연이?”

. 그때야 얼떨결에 서게 된 거라 별생각 없었는데. 그냥 막상 공연이 코앞이라 생각하니 쓸데없이 복잡해지네.”

그 텃세 부리는 녀석들 때문인가?”

 

하필 연 단위로 계약을 한 탓에 당장 내쫓을 수 없다는 사실을 다시 떠올리며 유중혁은 속으로 이를 갈았다. 계약이 만료되기만 하면 그 자식들을 당장 내쫓아버릴 생각이었다.

 

아니, 뭐 그런 건 아니고. 그냥 개인사야, 개인사.”

 

걸음은 조금도 느려지지 않았지만, 김독자의 눈동자 속에서는 시간이 거꾸로 흐르고 있는 것 같았다.

 

사실 다시 무대에 서게 될 줄 몰랐고, 그래도 되나 싶기도.”

 

문득 옆을 돌아본 김독자의 눈에 유중혁의 얼굴이 들어왔다. 눈썹을 꿈틀거리는 걸 보니 신경 쓰이는 모양이지. 김독자는 씩 웃으며 널따란 등짝을 때렸다.

 

괜한 소리 했네. 형이 다 알아서 하니까 심각한 표정 하지 마라, 인마.”

그놈의 형 소리. 한 번만 더 하면 가만 안 두겠다고 했는데.”

때릴 거냐? 지금 나 다치면 한수영이 가만있지 않을 텐데?”

 

깐죽대는 것에 유중혁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답했다. 물론 그 정도의 미묘한 근육의 움직임도 표정이라고 할 수 있다면 말이다. 그런데 김독자는 용케도 그런 변화를 기가 막히게 파악해내곤 했다.

 

어쭈, 무시하냐? 우리 중혁이 많이 컸네? 어디 거기도 많이 컸는지 볼까?”

 

음흉한 노인네처럼 히죽거리며 시선을 아래로 향한 김독자가 입을 떡 벌렸다.

 

잠깐, . 주머니에 뭐 넣었냐?”

죽인다, 김독자.”

 

그때 김독자는 유중혁의 눈빛을 보며 진심으로 자신을 죽일 수도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아니, 저건 진짜로 죽일 생각이다. 죽는다. 재빨리 달아나려던 몸짓이 허무하게도 거친 손이 목덜미를 낚아채고 가볍게 끌고 갔다.

 

김독자, 넌 뒈졌어.”

장난인 거 알지? 중혁아, 한 번만 봐주라. ?”

 

두 손을 모으고 불쌍한 표정을 짓는 것에 유중혁은 이를 갈고는 허공을 바라보았다. 상현을 넘어선 달이 차오르며 빛을 쏟아내고 있었다. 그게 녀석을 닮아 보이는 걸 보니 미쳐도 단단히 미친 모양이었다. 첫눈에 반했다고는 생각했지만, 글쎄. 멍청하고 한심한 모습에 실망하기보다는 오히려 기꺼웠다. 그래서 제 옆에서 깐죽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차오르는 감정을 가만히 헤아려 보았다.

 

***

 

드디어 스타 스트림의 재개장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오늘은 모든 공연의 최종 리허설이 이어지는 날이기도 했다. 억지로 끌려서 하게 된 일이긴 했지만 역시 막상 무대에 선다고 생각하니 기분 좋은 떨림이 느껴졌다. 그 바람에 어린 애처럼 잠을 설치고 평소보다 조금 늦게 지하철을 타고 말았다.

 

열차가 멈추고 문이 열리자마자 서둘려 달리는 것과 동시에 한 손으로는 가방을 뒤져 출입증을 찾고 있었다.

 

시발! 뭐야?”

 

자신은 바닥에 나뒹굴고 있는데 상대방은 잠시 휘청거리다 만 것을 보면 솔직히 자신이 타격을 더 많이 입은 것 같았다. 억울하긴 하지만 어쨌든 원인을 제공했으니 사과는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김독자는 고개를 들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늦어서 그만,”

? 이 새끼?”

 

올려다본 시야에는 낯선 얼굴이 있었다. 처음 보는 얼굴, 그러나 기억 속 어딘가에선 잊히지 않은 얼굴. 아마도 10년쯤 흐르면 이런 얼굴이 되었겠구나 싶은.

 

김독자는 황급히 고개를 숙인 채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얼굴이 보이지 않게 조심하며 깊이 허리를 숙인 후 다급하게 몸을 틀었다.

그러나 곧 어깨를 누르는 무게감에 몸을 떨었다.

 

이것 봐라. 맞지? 김독자.”

사람 잘못 보셨습니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이 좆 밥 새끼야.”

 

붙들린 팔에는 소름이 오소소 돋아났다. 안간힘을 써서 녀석을 뿌리쳐낸 김독자는 무작정 앞을 향해 달렸다. 조금이라도 속도를 늦추면 후들거리는 다리가 아예 멈추어버릴 것 같아서, 가슴이 터질 듯이 숨이 가빠와도 달리고 또 달렸다. 어디선가 유중혁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지만, 어서 달아나지 않으면.

 

김독자!”

 

또다시 어깨를 붙들린 김독자가 비명을 지르며 몸을 웅크렸다. 여기서 또 이렇게. 무력하게 다시.

 

정신 차려라, 김독자! 나다!”

 

머리를 감싸고 덜덜 떨던 김독자의 귓가에 익숙한 목소리가 선명하게 꽂혀 들어왔다.

 

중혁이?”

이제 정신이 드나?”

, .”

 

힘겹게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유중혁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뒤로 보이는 천장, 그리고 등 아래로 느껴지는 푹신한 감촉. 여기는 어디지?

 

왜 그러나, 악몽이라도 꾼 건가?”

 

악몽이라. 꿈이었구나. 김독자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 그래.”

정신 들었으면 내려와서 밥 먹어라.”

어어.”

 

김독자는 다시 한번 주위를 둘러보았다. 유중혁의 집. 가끔 한잔하고 싶긴 한데 피곤한 날에는 유중혁이 만들어주는 소소한 안줏거리를 먹으며 맥주를 마시다 잠들곤 했었다. 분명 어제도 그런 날이었지.

 

땀에 전 옷을 벗은 후 욕실로 향한 김독자는 생각에 잠겨 들었다.

송민우, 학창 시절의 악몽. 복수하고 싶다는 마음 한편으로는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공존했다. 살다 보면 한 번쯤 겪을 수 있는 사소한 트라우마라고 생각은 하지만, 글쎄. 막상 그 새끼를 만난다고 생각하면 본능적인 두려움에 휩싸이고 마는 것이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학습된 무기력.

 

시간이 모든 것을 해결해주지는 않는다. 어떤 상처는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더 단단하게 새겨져, 도저히 지워지지 않는 흉터로 남기도 한다는 걸 알고 있다. 어쩔 수 없으니 다만 모른 척 덮어둘 뿐.

 

땀으로 범벅이 된 몸을 씻으며 김독자는 거울을 바라보았다. 적당히 큰 키에 희고 마른 몸. 크고 작은 생채기로 가득한 어린 몸도, 수척한 뺨 같은 것들도 그 안에는 더 없는데. 뜨거운 물을 몸에 끼얹으니 수증기가 부옇게 올라오며 거울을 덮기 시작하고 이내 뿌옇게 흐려진 상만이 남았다. 마치 너는 누구냐고 묻고 있기라도 하듯 흐릿한 자아가 그 안에서 일렁이고 있었다.

 

***

 

재개장을 하루 앞둔 스타 스트림의 낮은 분주했고, 심지어 은근한 긴장감마저 감돌았다. 11시에 진행하는 무대 공연팀의 리허설이 순조롭게 마쳤고, 이제 2시에 진행되는 마스크 퍼레이드의 차례였다. 시간에 맞추어 실전처럼 공연 가이드들이 퍼레이드 루트를 따라 바리케이드를 둘렀다. 그리고 어트렉션의 점검을 마친 엔지니어들과 각종 파트의 스태프들이 관객이 되어 그 길을 둘러싸 앉았다.

 

평소보다 조금 더 들뜬 듯한 분위기를 느끼며 김독자는 퍼레이드 카에 올랐다. 악몽 탓에 평소보다 지친 얼굴이 가면 속에 가려졌다.

 

불편한 곳은 없으시죠?”

. 괜찮습니다.”

 

김독자는 몸을 좌우로 움직여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모를 사고를 대비해 의상 안쪽에 안전벨트를 채우고 퍼레이드 카에 고정한 것이다. 준비를 마치고 아래를 내려다보니 익숙한 얼굴이 웃으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평소 눈높이가 별 차이나지 않던 정희원이 내려다보이는 건 조금 묘한 기분이었다. 마치 허공에 매달린 기분이라 할까.

 

문득 유중혁이 생각났다. 어지간한 직원들은 모두 관객으로 동원되었으니, 어쩌면 녀석도 여기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열심히 두리번거려도 그 잘생긴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없나? 아니면 퍼레이드 루트를 따라가다 보면 언젠가 나타나려나? 아쉬운 마음을 가다듬고 김독자는 호흡을 골랐다.

 

곧 음악이 시작되었다. 경쾌한 멘트가 퍼레이드가 시작됨을 알리고, 퍼레이드 카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사실 무대 공연처럼 대단한 동작은 아니지만 계속 움직이는 차 위에서 30분 동안 미소를 짓는 것도, 그리고 틈틈이 관객들을 향해 손을 흔든다거나 손가락 하트를 만드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었다. 매끈한 바닥을 이동하며 발생하는 진동에 익숙해지자 관객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유중혁은 어디쯤 있을까. 시야에 들어오는 얼굴을 하나하나 훑으며 낯이 익은 직원들에게 손을 흔들어주던 김독자의 표정이 급격히 식어갔다.

 

송민우가 거기 있었다.

 

호흡이 가빠지고, 손이 떨렸다. 관객들 사이로 분명히 송민우가 있었다. 놈은 천천히 손을 올려 자신을 가리켰다. 김독자는 그 입 모양을 보았다.

 

살인자의 자식.’

 

아니야. 등줄기로 식은땀이 주르륵 흘렀다. 그러자 송민우의 옆에 있던 또 다른 송민우가 손을 흔들었다. 그 뒤에 있던 송민우는 자신을 향해 미소를 지었고, 또 다른 송민우는 자신의 모습을 찍어대고 있었다. 김독자는 정신을 차리려고 했다. 환각임이 당연했으나, 이미 사고하기를 포기한 머리는 윙윙거리는 진동음만을 내고 있었다. 시야가 빙빙 돌고, 속이 울렁거렸다.

 

불현듯 5년 전 그날이 떠올랐다. 첫 공연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현대무용계의 혜성이라며 수많은 기사가 올라온 그 날. 그리고 다음 날 현대무용계의 혜성 김독자, 그는 누구?’라는 제목의 기사와 함께 김독자는 별똥별처럼 처박혔다. 빌어먹을 운명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고 허우적거리는 초라한 목각 인형마냥 힘이 풀린 몸이 안전벨트에 묶여 휘청이고 있었다.

 

투둑.

무언가 끊어지는 소리와 함께, 김독자의 몸이 크게 기울었다. 발밑이 허전했다. 힘없이 바닥으로 추락하는 시간은 분명 찰나일 텐데도 한없이 길게만 느껴졌다. 김독자는 그렇게 의식을 놓았다.

 

***

 

원인은?”

 

유중혁의 얼어붙은 목소리에 몸을 떨며 직원이 대답했다.

 

안전장치에 이상이 있던 것으로 보입니다. 벨트를 고정하는 고리의 나사가 일부 소실된 것을 확인했습니다.”

소실?”

그런데 남아있는 나사들은 모두 단단히 고정되어있었습니다. 퍼레이드 카 설계자와 엔지니어들의 말에 의하면,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그 나사들만 빠져있을 수가 없다고 합니다.”

다른 건?”

그 외의 특이사항은 없습니다.”

알겠다.”

 

그제야 직원은 살았다는 듯이 재빨리 의무실을 빠져나갔다. 김독자의 상태를 살펴보던 이설화가 종이컵에 든 냉수를 건넸다.

 

다행히 바닥에 닿기 직전에 현성 씨가 받아냈다고 들었어요. 그래서 크게 다친 곳도 없고요.”

현성?”

공연 가이드신데, 마침 독자 씨가 지나가는 옆에 있다가 뭔가 이상해서 뛰어든 모양이에요. 아니었으면 정말 큰일 날 뻔했죠.”

다친 곳도 없는데 왜 깨어나질 않는 거지?”

글쎄요. 외상은 전혀 없으니 아마 심리적인 문제가 아닐까 싶네요. 아시겠지만 그런 쪽은 제가 도와드릴 수가 없어요.”

 

아침에 있었던 일을 떠올린 유중혁은 침음을 흘렸다. 꿈에서 덜 깨어난 채로 허옇게 질려 바들바들 떨던 김독자의 모습이 내내 걸리긴 했다. 그래서 바쁜 와중에도 틈틈이 창가를 내려다보며 김독자를 살피고 있었는데. 퍼레이드 카에 올라선 모습이 어딘가 위태로워 보여 급히 회의를 끝내고 달려왔지만, 너무 늦은 것이다.

 

긴장한 탓일지도 모르겠네요. 어쨌든 다친 곳은 없으니 금방 깨어나겠죠. 연락 드릴까요?”

아니, 여기서 기다리겠다.”

 

***

 

, 여기는 꿈속이구나.

누가 알려주지도 않았건만 김독자는 단번에 확신했다. 광활한 공간에는 아무도, 아무것도 없었다. 한참을 기다려도 적응되지 않는 어둠 속에서 추위를 느낀 그는 두 팔로 몸을 감쌌다가, 제 몸이 평소와 조금 다른 것을 인식했다.

 

작고 마른, 상처투성이의 몸. 아물기도 전에 다시 터져버리길 반복한 두꺼운 피딱지로 범벅이 된 얼굴과 가늘고 무력한 손. 외면하고 싶었던 과거의 모습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아니, 아니다. 이것이 본래의 제 모습이고, 여태 가면을 쓰고 있었던 걸지도.

 

김독자는 공연히 소리 내 웃었다. 하하하, 하하. 소리는 힘없이 공간으로 흩어졌다가, 메아리가 되어 기괴한 소리를 내었다.

 

넌 누 구지?

 

왜인지 모르지만, 대답을 해야 할 것 같은 느낌에 김독자는 입을 열었다.

 

나는 김독자. 28살이고, 회사원이었는데 지금은.”

 

그 게 다야?

 

그러고 보니 비슷한 말을 누군가에게 했는데. 엉망이 된 머릿속에서는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컴컴한 공간이 일그러지는 것이 느껴졌다. 존재가 깊은 늪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감각에 허우적거렸다. 누구라도 좋으니 날 좀 구해줘.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김독자. 또 악몽을 꾸는 건가?”

 

, 그래. 그러니 나 좀 깨워줘.

 

나는 네가 꾸는 악몽이 무엇인지 모른다. 묻고 싶었지만, 말하고 싶지 않은 것 같기에.”

 

중혁아, 이건 내 어린 시절의 악몽이야.

 

그러나 이제는 깨어나서 말을 해줬으면 좋겠군.”

 

사실 솔직히 말하면, 이건 꿈이 아니야. 분명히 현실인 적이 있었지. 그래서 말하고 싶지 않았어. 왜냐면 너도 다른 사람들처럼 나를,

 

무엇이든 상관없다. 전부 들어줄 테니 말해라.”

 

아니야, 알게 되면 너도 나를,

 

내가 듣고, 옆에 있어 주겠다.”

 

떠날 거잖아.

 

***

 

대부분의 직원이 퇴근한 시간, 불이 꺼진 회전목마 앞에 김독자가 무릎을 모으고 앉아있었다. 유중혁은 말없이 그 옆에 앉아서 김독자와 같은 방향을 바라보았다.

 

여태 퇴근 안 하고 있었어?”

그래.”

설마 나 기다린 거야?”

당연한 소리를 하는군.”

 

맑게 웃는 소리가 텅 빈 공간에 흩어졌다. 김독자는 여전히 무릎에 고개를 묻은 채로 말했다.

 

내 이름은 김독자, 홀로 독에 사람 자를 쓴 김독자야. 28살이고, 몇 달 전까진 게임회사 직원이었어. 그보다 더 전에는 찐따 새끼라든지, 살인자의 아들 같은 거로 불렸고.”

 

유중혁은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발끝을 까딱거리는 김독자는 평소보다 더욱 작아 보여, 어둠 속에 묻힐 것만 같았다.

 

제법 큰 무용 콩쿠르에서 상을 받아서 기사가 났었어. 이제 인생 좀 풀리나 싶었는데, 다음 날 내 과거가 풀려있더라고. 그래서 관뒀어.”

 

한동안 찌르륵 찌르륵 벌레가 우는 소리만이 이어졌다. 김독자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아무리 악을 쓰고 발버둥을 쳐도 돌고 돌아 결국은 제 자리야, 시발. 이렇게 꿈도 희망도 뭣도 없는 나 같은 새끼가 여기 있으면, 그야말로 동심파괴 아닐까?”

 

처연하게 빛나는 얼굴에 유중혁은 고개를 저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약한 소리 마라.”

하하, 역시 이해 못 할 줄 알았어.”

 

그렇게 자조하는 얼굴은 금방이라도 눈물을 떨어뜨릴 듯했다. 위태롭게 흔들리는 몸이 밤하늘로 흩어져 버릴 것만 같아, 잠시 망설이던 유중혁의 팔이 끝내 좁은 어깨를 감싸 안고 말았다.

 

그렇게 돌고 돌아서, 결국 여기에 오지 않았나.”

여기?”

그래. 네 놈이 있을 자리 말이다.”

 

점검이 끝나지 않았던 것일까. 그 순간, 회전목마에 조명이 들어왔다. 어둠 속에서 고개를 떨구고 있던 말들 위로 빛이 비추어지고, 선율이 흘러나왔다. 그러자 말들은 이내 생기를 얻어 천천히 달리기 시작했다. 회전목마가 돌아감에 따라 조명이 화려하게 그 색을 바꾸어 나갔다. 형형색색으로 빛나는 조명이 두 사람의 얼굴에 드리워졌다.

 

과거는 상관없다. 지금 이 시간을 어떻게 살아가는 것만이 중요할 뿐이다.“

 

유중혁은 단단한 팔에 붙잡아 둔 제 별을 응시했다. 창백하게 떨리던 눈물의 색이 조명을 받아 영롱하게 바뀌어 나가고 있었다. 크게 숨을 들이킨 유중혁은, 속에 감춰둔 말을 내뱉어냈다.

 

김독자, 앞으로의 시간은 내 곁에서 보내지 않겠나.”

 

대답은 없었다. 김독자는 그저 어깨를 떨며 흐느낄 뿐이었다.

 

두 사람 앞에는 여전히 흐르는 선율을 따라 회전목마가 움직이고 있었다. 마치 이제 다시는 멈추지 않을 듯이 돌고, 돌고 또 돌면서.

 

***

 

넘어져서 무릎이 까진 아이에게 반창고를 붙여준 이설화는 고개를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벌써 8시네?”

 

남궁 민영은 백스테이지에서 배우들의 어깨를 토닥이고 있었다. 다만 그녀가 한 번 토닥일 때마다 배우들의 몸이 휘청거렸고, 키리오스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리고 반대편에서는 한수영이 스태프들을 향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마지막 점검자 누구야? 확실히 이상 없어?”

수영 씨, 너무 긴장하신 거 아니에요?”

 

그 말에 무어라 대꾸하려던 한수영의 목소리는 뒤이은 안내 방송에 묻혀버렸다.

 

고객 여러분께 안내 말씀드립니다. 잠시 후 8시에 서머 나이트 퍼레이드가 시작될 예정입니다. 퍼레이드는 30분간 진행되며, 일부 어트랙션의 운행이 중지되오니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또한 퍼레이드가 끝날 때까지 퍼레이드 루트의 이동이 제한되오니 이용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이윽고 시곗바늘이 정각 8시를 가리키자, 퍼레이드의 주제곡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여러분 안녕하세요? 여기는 꿈과 희망의 나라, 스타-스트림입니다! 이제 스타 스트림의 새로운 시작과 함께, 빛과 어둠의 계절이 여러분 앞에 펼쳐집니다! 자아, 준비 되셨나요?”

 

사회자인 디오니소스가 힘차게 공연의 시작을 알리는 모습을 장하영이 재빠르게 사진으로 담아 스타 스트림 공식 계정에 올렸다.

 

, 너 때문에 늦었잖아!”

너 때문이거든?”

 

이길영과 신유승은 인파를 비집고 서둘러 달려 나갔다. 달음박질하느라 바쁜 와중에도 서로 어깨를 툭툭 밀며 서로를 탓하는 아이들을 보며 이지혜가 손을 흔들었다.

 

퍼레이드 끝나면 후룸라이드로 와!”

 

신유승은 그 옆에서 이지혜의 관심을 끌기 위해 노력하는 김남운을 못 본 척하며 대답했다.

 

알았어요!”

 

바리케이드 앞에서 사람들을 통제하던 정희원과 이현성이 아이들을 발견했다.

 

얘들아, 그러다 넘어지겠다!”

서로 잃어버리지 않게 조심해!”

 

우려한대로 아이들은 인파에 떠밀려 휘청였으나, 다행히 중년 여성이 붙잡아 앉혀주었다.

 

어머, 너희들끼리만 온 거니? 보호자는?”

있어요! 저기서 나올 거예요! 누구냐면,”

 

아저씨 자랑을 하려던 이길영은 문득 그 중년 여성이 김독자와 무척이나 닮았다고 생각했다.

 

그 때, 김독자는 거울을 보고 있었다. 화려한 분장을 한 낯선 남자, 구원의 마왕이 거울 속에서 자신을 마주하고 있었다. 자신을 내 던져 사랑하는 것들을 지켜낸 남자. 그를 담아낼 자격이 있냐고 저에게 끊임없이 물어대는 사람들이 있었고, 그럴 때마다 자신을 방어하기에 급급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럴 필요조차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나는 김독자, 그게 다야. 시시해도 상관없어.”

 

퍼레이드 루트를 바로 앞에 두고, 발끝을 향한 시선을 들었다. 그곳에 눈부실 정도로 환하게 웃고 있는 유중혁이 있었다. 내가 살아갈 세계라면 분명히 있으니까.

 

‘The season of light and night. As the night goes on, the light shines brighter.’

 

노래가 흐르기 시작하고 가로등이 하나둘 불을 밝혔다. 김독자는 길게 숨을 내쉬고 정면을 응시했다. 눈앞에 펼쳐진 퍼레이드 루트는 매일 같은 것 같지만 완전히 같지는 않았다. 그리고 연약하지만 절대 부서지지 않는 별이 자신의 이야기를 향해 걸어 나가기 시작했다.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