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 가쁘게 진행되던 메인 시나리오가 종료된 직후. 다음 시나리오가 시작되기 전까지 약간의 여유가 생겼다. 실로 오랜만에 찾아온 휴식기였다.

 

[메인 시나리오가 종료되었습니다!]

[보상 정산이 시작됩니다!]

 

저 짧은 문장을 보기 위해 김독자 컴퍼니 일행은 이번에도 몇 번이나 힘겨운 싸움을 치러야 했다. 무사히 시나리오의 한 챕터를 넘어왔다는 안도감, 일행들이 목숨을 걸고 만든 이야기에 대한 보상이 고작 몇 푼의 코인이라는 것에 대한 분노, 이번에도 나를 믿고 따라준 일행들에게 드는 고마움. 고된 시나리오 진행이 일상이 된 지도 오래였지만 익숙함이라는 단어 하나로 휘몰아치는 여러 감정을 완전히 지워낼 수는 없었다. 하지만 괴로운 감정에 취하는 것도 잠시뿐이다.

 

[전용스킬, ‘4의 벽이 발동합니다!]

 

4의 벽이 말합니다. ‘김독 자 멍 청 이.’

 

김독자는 [4의 벽]의 말을 못들은 체하며 주위를 둘러봤다. 시나리오가 끝난 직후인 이맘때쯤은 평소라면 한창 활기를 띠었을 시간이다. 다음 시나리오로 이동하기 전에 주어지는 보상 정산 시간. 맘 놓고 편히 쉴 수도 없을 정도로 짧은 시간이지만 모두가 이 순간만을 손꼽아 기다렸고, 이때가 오면 그제야 이번에도 무사히 살아남았음을 실감했다. 일행들에게 보상 정산은 서로의 노고를 위로하는 말을 나누고, 긴장을 푼 채 담소를 나누며 막간의 여유를 즐길 수 있는 그런 시간이었다.

 

오늘따라 정산 시간이 길게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그러게 말이에요.”

 

다만 오늘은 곧 찾아올 휴식기에 대한 기대감 때문인지 모두의 얼굴에 여유로움 대신 초조함이 떠올라 있었다. 이현성과 정희원의 말을 들은 김독자도 오늘따라 시간이 더디게 흐르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성격 급한 이길영은 먼지 날리니깐 가만히 좀 있어!’라는 신유승의 타박에도 발을 동동 굴러댔다. 그리고 잠시 뒤. 체감상으로는 10년 같이 느껴졌던 10분이 지나고, 애타게 기다리던 메시지 소리가 들려왔다.

 

[보상 정산이 완료되었습니다.]

[다음 시나리오는 10일 뒤에 시작됩니다.]

[포탈을 이용하여 시나리오 지역을 벗어나십시오.]

[다음 시나리오가 시작되기 전까지 원하는 구역으로 이동할 수 있습니다.]

 

모처럼 맞이한 꿀 같은 시간을 한순간도 낭비하고 싶지 않은 것은 모두가 마찬가지였다. 메시지를 확인한 김독자 컴퍼니 일행은 곧장 포탈을 통해 서울로 귀환했다. 성채의 바로 아래쪽에 적힌 유중혁김독자 공단이라는 거대한 글자를 뒤로하고 [공단]의 중앙으로 향한 일행들을 반긴 것은 [공장]의 입구에 서 있는 익숙한 얼굴들이었다. 남아있던 사람들에게도 시나리오 종료 메시지가 뜬 모양인지 마중을 나온 듯했다. 반갑게 인사를 나눈 그들은 밀린 회포는 차차 풀기로 한 뒤 우선은 각자의 방으로 흩어졌다. 오랜만에 만난 사람들과 나누는 안부 인사도 중요하지만 막 시나리오를 끝내고 돌아온 이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휴식이었기 때문이다.

 

찰싹! 찰싹!!

 

아바앗!”

 

다음 날. 뺨을 누르는 폭신하고 몰캉한 손길을 느끼며 김독자는 잠에서 깨어났다. 한창 달게 자던 중에 깨워졌지만 깊게 숙면을 취한 덕분인지 정신은 맑고 개운했다. 잠기운이 가신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니 얼굴 옆에 둥둥 떠 있던 비유가 시야로 들어왔다. 빵빵한 털 사이로 쭉 뻗은 짧은 팔을 보아하니 김독자를 깨우기 위해 비유가 작은 손으로 그의 뺨을 때리고 있었던 것 같았다.

 

비유야 잘 잤어?”

바앗!”

그래그래. 잘 잤나 보네. 아빠는 왜 깨웠어? 무슨 일 있어?”

 

다정하게 머리를 다독이는 김독자의 손길을 눈까지 꼭 감은 채 만끽하고 있던 비유가 김독자의 물음에 아차!’하는 표정을 온 얼굴에 띄웠다. 귀여운 모습에 녹아내린 심장을 부여잡은 김독자는 연신 문을 가리키는 비유를 보고 금세 비유가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알아챘다.

 

다들 일어났나 보네. 비유한테 아빠 데려오라고 했어?”

아바밧.”

알았어. 읏차, 얼른 준비하고 나가야겠네.”

 

시나리오 진행 중에 누리기 힘든 사치 중의 하나인 따뜻한 물로 샤워하기로 남은 피로를 마저 풀어낸 김독자는 편안한 옷을 입고 방을 나섰다. 떠났던 사람들이 돌아온 탓인지 창밖으로 내려다보이는 [공단]에는 오랜만에 활기찬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그 풍경을 바라보며 [공장]의 복도를 걷고 있으니 휴식기가 찾아왔다는 것이 새삼스레 실감됐다.

 

아밧.”

우리 비유 길도 잘 찾네! 이쪽으로 가면 돼?”

바바밧.”

 

머리 위에 앉아 있는 비유가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는 방향으로 이동하던 김독자는 생각했다. ‘정말로 휴식기구나.’라고. 늘 바쁘게 달리다가 갑자기 멈춘 탓에 생긴 후유증인지 휴식기가 찾아온 게 사실인 것 같이 느껴지지 않았다. 쉴 틈은커녕 마음 편히 식사할 시간도 없었던 김독자 컴퍼니가 아니었던가. 늘 휴식을 갈망했지만 갑작스럽게 멈춰 서니 편안함보다는 왠지 모를 초조함이 먼저 밀려들었다.

 

당장 열흘 뒤에 다음 시나리오가 시작되는데, 이렇게 쉬어도 좋은 걸까? 이번에는 어떤 계획을 세워야 하지? 지금 단계에서 필요한 것은……

 

쉬지 않고 달린 덕분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그러나 짧지 않은 거리를 전속력으로 계속 달리는 것이 힘겹지 않을 리 없었다. 시나리오의 끝이 점점 다가오는 지금. 심적 중압감은 더해져만 갔고, 회복되기도 전에 심각한 손상이 중첩된 육체는 더 빨리 지쳐갔다. 성좌인 김독자 이럴 진데 화신의 몸으로 김독자만큼이나, 아니 어쩌면 김독자보다 더 많이 고생한 일행들은 한계에 달한 상태겠지. 그런 일행들에게 지금과 같은 휴식기는 진즉에 주어졌어야 할, 합당한 보상일 테다.

 

그래. 가끔은 이렇게 쉬는 것도 필요하겠지.’

 

여태껏 김독자는 일행들의 안위를 생각하지 않고 일을 저지른 적이 맹세코 단 한 번도 없었다. 늘 그들을 위했고, 선택한 길이었다. 하지만 그 선택을 하는 데 정작 일행들의 의사는 고려되지 않았던 게 사실이다. 그들은 아무것도 모른 채 김독자가 홀로 만든 이야기에 끌려 들어왔고, 몇 번이고 절망하며 발버둥 쳐야 했다. 수없이 많은 시나리오를 거듭한 이후에야 김독자도 알게 되었다. 자신의 선택이 그들에게 큰 상처를 주었음을 그런데도 그들이 그를 용서해주었음을. 그리고 그들도 알고 있을 것이다. 또 같은 상황이 닥친다면 김독자는 모두를 구하고 홀로 희생하는 길을 선택하리란 것을.

 

그것을 알기에 일행들은 늘 불안해했고, 김독자는 그들에게 미안한 감정이 있었다. 매번 그들만 남겨두고 떠난 것도 모자라서, 옆에 있을 때 조자 제대로 챙겨주지 못했던 저에게 준 믿음, 신뢰, 애정. 그들을 향한 미안함과 고마움은 내가 죽는 그 날까지도 모두 갚을 수 없겠지. 김독자는 그들에게 받은 것의 일부분이라도 돌려주기 위해 노력하자고 결심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휴식기는 좋은 기회였다.

 

이번 기회에 김독자 컴퍼니 사원들이 제대로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사장인 내가 더 노력하자!’

 

김독자 컴퍼니의 사원들이 들었다면 저 자식 가둬!”라고 소리치며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아도 의식주가 모두 해결되는 호화로운 방에 김독자를 감금시키려 들었을 만한 생각을 마음속으로 거듭 다짐한 김독자는 서둘러서 발길을 옮겼다.

 

비유가 이끄는 방향으로 이동한 끝에 도착한 곳은 [공장]의 한 층에 자리한 주방이었다. 중앙에 넓은 식탁이 놓인 주방 안에는 김독자가 예상했던 대로 김독자 컴퍼니 일행이 모두 모여 있었다. 아침식사준비를 하고 있던 참인지 다들 분주해 보였다. 준비는 거의 마무리 단계인지 식탁 위에는 이미 인원수만큼의 식기류가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오던 길에 다짐한 데로 일행들의 일거리가 줄어들도록 뭐라도 거들기 위해 김독자는 주방을 훑어보았다. ‘음식은 완성된 것 같고, 그릇이라도 옮길까?’라고 생각하고 있던 순간.

 

독자 씨, 좋은 아침입니다!”

잘 잤어요? 딱 맞게 내려왔네요.”

독자 아저씨, 이쪽으로 앉으시면 돼요!”

독자 형은 내 옆에 앉을 거야!”

 

주방 입구에 멀뚱히 서 있던 김독자를 발견한 김독자 컴퍼니 일행은 부산스레 아침 인사를 건네며 그의 혼을 빼놓더니 냉큼 식탁 정중앙의 상석에 앉혀버렸다. 힘으로 벗어나려면 못 벗어날 것도 없는 손길이었으나 워낙 창졸간에 당한 일이라 반항 한 번 못해본 김독자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식탁에 착석했다.

 

저도 식사준비를 도우려고 했습니다만.”

독자 씨는 그냥 가만히 앉아 있는 게 도와주는 거예요.”

맞습니다. 거의 다 끝났으니 그냥 앉아계시면 됩니다.”

 

슬그머니 일어나려던 김독자는 있는 힘껏 어깨를 내리누르며 살벌하게 읊조리는 정희원과 손사래까지 치며 거듭 만류하는 이현성을 보고 의자에 도로 엉덩이를 붙일 수밖에 없었다. 비장했던 다짐이 무색하게도 뭔가를 시작해보기도 전에 제지당해버렸다. 게다가 도움이 안 된다는 말까지 들은 김독자는 조금 의기소침해져서 저도 모르게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김독자의 표정을 본 한수영은 오만상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렇게 심심하면 애들이나 놀아주고 있어!”

 

서로 김독자의 옆에 앉겠다며 티격태격하고 있던 아이들은 한수영의 말을 듣자마자 서로 저가 먼저 얘기하겠다며 김독자 쟁탈전을 시작했다. 불꽃 튀는 <가위바위보 삼세판>의 승자는 신유승이었다. 우선 발언권을 빼앗긴 이길영은 울상을 지으며 씩씩거렸다. ‘김독자 쟁탈전’ 2회차가 벌어지기 전에 겨우 아이들을 어르고 달래 양옆에 앉히는 데 성공한 김독자는 식은땀이 다 나는 기분이었다. 아이들 사이에서 쩔쩔매고 있는 저를 보며 낄낄대는 한수영을 흘겨본 김독자는 아이들이 조잘조잘 떠드는 모습을 지켜보며 식사준비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마침내 식탁 위가 다 채워지고 모두가 식탁에 앉았을 때 김독자는 진심 어린 감탄사를 내뱉었다.

 

, 아침부터 식탁이 정말 화려하네요.”

다들 그간 고생하셨으니 잘 먹어야죠. 피로에는 잘 먹고 잘 쉬는 것만큼 좋은 약이 없답니다.”

설화 씨 말이 맞아요. 그동안 못 먹었던 만큼 먹을 거예요.”

 

정성 들여서 조리한 음식들은 시나리오 진행 중에 먹던 소금만 뿌려서 마법화로에 구운 괴수종 고기와는 빛깔부터 달랐다. 잔뜩 뿌려진 향신료는 한껏 입맛을 돋웠고, 어디서 구한 것인지 모를 각종 채소의 풍성한 식감은 완벽했다. 진수성찬이라도 불러도 좋을 법한 음식이 식탁 위를 가득 채운 것에 놀란 김독자가 감탄의 말을 꺼내자 기다렸다는 듯이 걱정 섞인 잔소리와 한이 서린 푸념 등이 쏟아져 내렸다. 그에 김독자는 멋쩍은 미소를 지은 채 앞 접시 위로 가득 덜어진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그리고 식탁 주위를 둘러보던 김독자는 문득 떠오른 의문에 말을 꺼냈다.

 

그런데 중혁이가 안 보이네요?”

, 중혁 씨는 잠시 자리를 비운다고 하셨던 것 같습니다.”

사부는 갈 데가 있다고 아침 일찍 나갔어.”

그렇구나.”

 

모처럼 휴식기인데아침도 거르고 어딜 간 거지?’

 

유중혁이 말도 없이 자리를 비우는 게 하루 이틀 일은 아니었기에 별생각 없이 꺼낸 말인데, 분위기를 보아하니 저를 뺀 모두가 유중혁의 외출 소식을 알고 있었던 기색이다. 식탁 위로 다소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김독자는 괜히 섭섭한 마음이 울컥 치솟았지만 오랜만에 모두가 함께 갖는 식사시간을 망치고 싶진 않았다. 미간을 손으로 문지르며 가라앉으려는 기분을 애써 갈무리하고 표정을 가다듬었다. 그리고는 아무렇지 않은 척 다른 이야기로 주제를 돌리자 다들 어색하게 맞장구를 쳤다. 김독자의 노력이 무색하게도 다들 그의 기분을 눈치챈 것 같았지만 그것을 지적하는 사람은 없었다. 몇 마디의 말이 오간 뒤, 조금 전의 일은 잊은 듯 다시 식탁 위로 소란스러운 대화가 오갔다. 그에 김독자는 안도의 한숨을 몰래 내뱉었다.

 

그동안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했던 한을 풀려는 듯 평소 입이 짧았던 김독자를 포함한 모두가 먹성 좋게 먹어댄 덕분에 잔뜩 쌓여있던 음식들은 흔적도 없이 말끔히 사려졌다.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식사를 마친 일행들은 설거지까지 깔끔하게 끝낸 뒤 푹신한 소파가 놓인 응접실로 자리를 옮겼다. (물론 김독자는 설거지를 돕는 것에도 실패했다.)

 

~ 너무 좋다! 이게 얼마만의 휴일이지?”

그러게요. 이렇게 맘 놓고 쉬는 건 처음인 것 같습니다.”

매일 이렇게 놀기만 하고 싶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화신 이길영의 의견에 동의한다고 말합니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평화로운 시나리오 진행에 만족하며 머리를 긁습니다.]

 

일행들은 부른 배를 두드리며 소파에 거의 눕듯이 걸터앉아 녹은 찹쌀떡처럼 잔뜩 늘어져 있었다. 성좌들 또한 최근의 시나리오에서 전력을 다했던 터라 평화롭다 못해 지루하기까지 한 시나리오 진행에도 불만을 내비치지 않았다. 이런저런 담소를 주고받으며 간간이 떠오르는 성좌들의 간접메시지를 구경하고 있던 무렵이었다. 여태 김독자의 품에 얌전히 안겨있던 비유가 갑자기 몸을 바르르 떨더니 끙하는 소리는 냈다. 그와 동시에 일행들의 귓가로 익숙한 메시지가 들려왔다.

 

, 쉴 틈을 안 주네.”

 

[서브 시나리오가 도착했습니다!]

 

 

<서브 시나리오 여름 휴가>

분류 : 서브

난이도 : C

클리어 조건 : 시나리오 지역으로 입장하여 주어진 일정표에 따라 여름 휴가를 보내시오.

제한 인원 : 2

제한시간 : 5

보상 : 100,000 코인, 동료와의 ???

실패 시 :

 

 

[해당 시나리오 지역은 입장 인원수에 제한이 있습니다.]

[포탈로 입장하면 시나리오 지역으로 전송됩니다.]

[시나리오가 종료되기 전까지 시나리오 지역을 이탈할 수 없습니다.]

 

 

잔뜩 경직된 채 시나리오 내용을 확인한 일행들은 이내 한숨을 토해냈다. 긴장감이 서려 있던 응접실의 분위기도 봄을 맞이한 눈사람처럼 사르르 녹아내렸다.

 

이런 시답잖은 시나리오를 요청한 건 어떤 얼빠진 성좌야?”

, 놀러 간다고 생각하고 편하게 다녀오면 되겠네요.”

놀고먹는 시나리오의 난이도가 C라고? 의심스러운데.”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화신 한수영에게 모든 일을 의심하는 태도는 좋지 못한 태도라고 조언합니다.]

 

헛소리는 넘기고요. 수영 씨 말에도 일리가 있어요. 거기다가 휴가라면서 제한 인원이 2명이네요.”

“2명이서 여름휴가라. 커플여행이라도 다녀오길 바라는 걸까요?”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화신 정희원의 발언에 서운해합니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화신 유상아의 발언에 콧김을 내뿜습니다.]

 

정희원의 말대로 이번 시나리오는 모든 사람에게 동시에 내려온 서브 시나리오임에도 제한 인원이 조건으로 명시되어있었다. 누가 시나리오에 참가할 것인가를 정하기 위해 다 같이 머리를 맞대고 고민했지만, 결정은 쉽게 내려지지 않았다. 게다가 시나리오 난이도보다 보상이 좋은 편이라 다들 시나리오에 참가하고 싶은 눈치였다.

 

역시 이럴 때 대표인 내가 빠져줘야지!’

 

드디어 사원들을 위해 대표가 나설 때가 왔다는 생각으로 김독자가 이번 시나리오에 참가하지 않겠다는 말을 꺼내려고 하는 순간이었다. ? 하는 소리와 함께 신유승이 먼저 말을 꺼냈다.

 

시나리오 창 맨 밑에 접힌 부분이 있는 것 같은데요?”

? 정말이네? <더 보기> 버튼이 있었네.”

시나리오 창에 <더 보기> 버튼이라니. 이건 또 무슨 장난인 거지?”

 

화면이 잘리는 게 제일 싫다며 투덜거리며 숨겨진 나머지 내용을 확인한 일행들은 순식간에 떫은 감을 삼킨 표정을 지었다. 다만 김독자는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신유승의 말을 듣고 시나리오 창을 아래로 내려 보았으나 그의 시나리오 창에는 문제의 <더 보기> 버튼이 없었다.

 

제 시나리오 창에는 <더 보기> 버튼이 없는 것 같네요. 혹시 <더 보기> 버튼이 없으신 분이 또 계십니까?”

, 나는 있어.”

저도 있습니다.”

저도 있네요.”

저도 있어요!”

 

설마 했는데 정말로 김독자의 시나리오 창에만 <더 보기> 버튼이 없었다. 일행들의 표정은 여전히 떨떠름해 보였다. 저의 시나리오 창만 다른 사람들의 것과 다르다는 것에 의문이 생긴 김독자는 일행들에게 <더 보기> 아래에 적힌 내용에 관해 물었다. 하지만 일행들은 묘한 눈길로 김독자를 바라보며 대답을 회피했다. 유중혁의 외출 건도 저만 몰랐는데, 시나리오 내용도 제 것만 다르다니. 오늘만 벌써 두 번째였다. 일행들은 다 아는 데 저만 모르는 일이 생긴 게. 김독자는 다시 한 번 서운해졌다. 이번에는 굳이 기분을 숨기지 않고 나는 지금 굉장히 서러움!’이라고 적어둔 것 같은 표정까지 온 얼굴로 표현했다. 다들 김독자의 표정을 무시한 채 대화를 이어나갔다.

 

일단 그럼 시나리오 참가자는 정해진 것 같네요.”

이거 그쪽으로도 시나리오가 간 거겠죠?”

그렇지 않을까요? 곧 올 것 같네요.”

내가 형이랑 같이 가고 싶었는데!”

이길영…… 너는 눈치라는 게 다 죽었니?”

아저씨 건투를 빌어!”

? 저는 이번 시나리오에 참가하지 않을

 

!!!!!

 

갑작스러운 굉음에 김독자는 깜짝 놀란 듯 눈을 댕그랗게 떴다. 일행들은 예상했다는 듯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이었고, 도리어 몇몇은 김독자를 향해 의미심장한 표정까지 보내왔다. 곧이어 무언가 못마땅한 듯 불만스럽게 툴툴거리고 있던 이길영의 뒤쪽에 있는 응접실의 문이 벌컥 열렸다. 응접실로 들어선 사람은 유중혁이었다. 그의 흉흉한 표정을 보아하니 굉음의 정체도 그였던 듯했다.

 

유중혁? 넌 어디를 다녀왔기에 표정이 그러냐.”

……일단은 다녀오지.”

사부 파이팅!”

중혁 아저씨 꼭 성공해요!”

아니 잠깐!?”

 

[시나리오 지역에 입장하였습니다!]

[제한된 인원이 모두 입장하여 포탈이 닫힙니다.]

 

알 수 없는 이지혜와 신유승의 외침을 뒤로한 채. 유중혁에게 손목이 잡힌 김독자는 순식간에 포탈 안으로 끌려들어 갔다.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시나리오 지역에 도착한 김독자는 순식간에 일어난 일에 어안이 벙벙했다. 혼란한 정신을 가까스로 수습한 김독자는 여전히 유중혁에게 잡혀있는 제 손목을 보고 다시 한 번 넋이 나갈 뻔했다. 때맞춰 귓가를 울리는 익숙한 메시지가 아니었다면 멍청한 표정으로 굳어버렸을 것이다. 끊어지기 직전인 정신 줄을 부여잡고 김독자는 메시지의 내용을 확인했다.

 

전체 일정표는 요약본이고, 상세 일정표가 따로 있다는 얘기인 것 같군.”

그러게, 상세 일정표는 매일 아침에 뜬다고 적혀있네.”

 

유중혁의 말처럼 메시지에는 총 45일간의 주요 일정과 주의사항만이 짤막하게 적혀있었다. 눈에 보이는 일정표는 너무 평범해서 도리어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로 전형적인 휴가 계획들로 채워져 있었다.

 

유중혁과 내가, 단둘이서 휴가를 보내야 한다고?’

 

섬에는 유중혁과 김독자, 둘 외에는 아무도 없는 것이 분명했다. 심지어 채널도 열리지 않는 곳인 듯 간접메시지조차 들리지 않았다. 이런 고요한 섬에서 자그마치 45일을 보내라니. 김독자는 어색한 기분에 괜히 귓불을 만지작거렸다. 두 사람이 메시지의 내용을 모두 확인하자 연이어 새로운 메시지가 날아왔다.

 

[현재 위치는 섬 동쪽에 있는 스노우 비치입니다.]

[오솔길을 통해 섬의 중앙에 있는 숙소로 이동하십시오.]

 

시나리오 지역은 바다 한가운데 떠 있는 섬이었다. 눈앞으로 펼쳐진 하얗게 빛나는 백사장과 끝이 보이지 않는 짙푸른 바다를 뒤로하고 포탈이 있었던 방향을 바라보자 빽빽하게 솟은 울창한 숲이 보였다. 그 사이로 난 길은 하나뿐이었기에 유중혁과 김독자는 바로 그곳으로 향했다.

 

오솔길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좁은 길에는 습기를 머금은 나무껍질과 나뭇잎이 얕게 깔려 걸음을 옮길 때마다 푹신한 감촉이 발전체로 전해졌다. 나뭇잎 사이로 쏟아지는 햇살은 바람이 불 때마다 다른 빛으로 일렁이며 보석처럼 반짝였다. 쉬이 만날 수 없는 아름다운 풍경이었지만 그 사이를 걷고 있는 두 사람에게는 그 풍경을 감상할 여유가 없었다. 다만 한껏 어색한 기운만이 둘의 사이를 맴돌 뿐이었다.

 

길이 왜 이렇게 좁은 거야!’

 

폭이 좁고 양옆이 경사진 지형 때문에 유중혁과 김독자는 어쩔 수 없이 잔뜩 붙어 선 채로 걷고 있었다. 몸이 움직일 때마다 두 사람의 어깨며 팔, 때로는 손등이 스치듯이 맞닿았고, 김독자는 그럴 때마다 매번 화들짝 놀라며 눈에 띄게 온몸을 움찔거렸다. 유중혁은 태연하게 보였으나 실상은 김독자의 몸이 움찔거릴 때마다 저 또한 미미하게 몸을 굳힐 정도로 긴장한 상태였다.

 

서로에게 호감이 생긴 지는 예도 옛적이었고, 상대방 또한 저에게 관심이 있다는 것을 눈치챈 지도 오래였다. 하지만 숨 가쁘게 돌아가는 시나리오 때문에 몇 날 며칠씩 얼굴을 보지 못할 때가 다반사였고, 겨우 얼굴을 맞대고 앉았을 때는 다른 일행들 또한 함께 자리해있는 터라 사이를 진전시킬 기회는 고사하고 대화를 나눌 틈조차 없었다. 물론 김독자는 열린 연애관을 갖고 있어서 서로에게 확실한 호감이 있고, 두 사람 모두 그것을 알고 있다면 굳이 사귀자는 말을 하지 않아도 암묵적인 상호동의하에 자연스럽게 연인이 될 수 있다.’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좋아하게 된 사람이 풍기 문란한 외형과는 달리 굉장히 보수적인 연애관을 가진 유중혁이었던 탓에 여태 고백 타이밍만 재고 있는 상황이었다.

 

김독자는 김독자대로, 유중혁은 유중혁대로 완벽한 고백 타이밍을 재느라 서로 눈치만 보다가 그 기간이 어영부영 길어졌다. 그러다 어느 날 정신을 차리고 보니 두 사람의 사이로 흐르던 풋풋한 썸의 기운은 온데간데없고, ‘누가 먼저 고백을 하느냐!’라는 기묘한 대치상태만 남아있었다. 누구를 탓할 수도 없는 상황에 피눈물이 흐를 지경이었다.

 

하지만 의도치 않게 참여한 시나리오 지역에는 두 사람뿐이었고, 그들을 방해할 요소도 없었다. 그에 김독자는 생각했다. 양보하려던 꿀 시나리오를 의도치 않게 차지한 게 일행들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이렇게 된 이상 이번에야말로 기필코 고백에 성공하고야 말겠다고. 납치되듯이 참가한 시나리오였지만 어쨌든 기회는 찾아왔고, 김독자는 그 기회를 놓칠 마음이 결단코 없었다. 물론 기회를 만들기 위해 김독자를 납치해온 유중혁 또한 김독자와 같은 마음이었다.

 

하지만 필승다짐을 했다고 해서 분위기가 단번에 극적으로 변하는 일은 없었다. 두 사람이 잘나가는 성좌이자 한반도 최강의 화신이라고 해도 말이다. 변칙적인 시나리오 진행은 누구보다 능숙하게 대처할 수 있지만, 연애에 한해서는 한없이 미숙하기 그지없는 두 사람이었다. 서로를 한껏 의식한 탓에 되레 어색한 분위기로 얼마간을 걸었을까. 드디어 오솔길의 끝이 보였다.

 

오솔길을 벗어나자 나타난 곳은 나무로 둘러싸인 널찍한 공터였다. 공터의 중앙에 보이는 원목으로 지어진 멋스러운 2층짜리 별장이 그들이 머무를 숙소인 듯했다.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텃밭과 화단이 있는 앞마당을 지나서 돌계단으로 올라서자 현관문이 소리도 없이 스르륵 열렸다.

 

[숙소에 도착하였습니다.]

[서브 시나리오 여름 휴가1일 차 일정이 진행 중입니다.]

[‘일정표 1일 차에 따라 시나리오를 진행하십시오.]

[현재 일정표 1일 차의 진행률은 20%입니다.]

 

현관문을 통과해 숙소로 들어서자 두 사람을 환영하듯 다시 한 번 메시지가 날아들었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두 사람은 메시지 내용을 확인했다. ‘일정표 - 1일 차에는 첫째 날의 일정이 상세하게 적혀있었다. 첫째 날의 일정은 대략 숙소로 이동저녁 식사산책자유 시간취침이었다. 첫날이라서 그런지 일정은 다소 여유 있었다.

 

아직 저녁 식사를 하기는 이른 시간이었기에 두 사람은 우선 숙소를 둘러보기로 했다. 숙소는 밖에서 보았던 것처럼 2층에 다락방이 있는 구조였다. 1층은 크게 주방과 거실 나눠지고, 거실과 테라스가 이어져 있었다. 2층으로 올라가니 일직선 상의 복도로 침실 두 개와 다락방으로 통하는 계단이 차례로 늘어서 있었다. 화장실과 욕실은 침실마다 개별로 딸려있었다. 2층의 복도에서는 1층의 거실이 내려다보였다. 유중혁이 먼저 첫 번째 방을 사용하겠다고 말했고, 그에 김독자는 두 번째 방을 사용하게 되었다.

 

숙소를 둘러보고 사용할 방까지 정한 두 사람은 남은 시간 동안 방에서 휴식을 취한 뒤 1층에서 모이기로 했다. 잠시 뒤에 보자는 김독자의 인사를 마지막으로 두 사람은 각자의 방으로 들어갔다. 혼자 사용하기에 다소 넓은 방 안은 침대와 협탁, 붙박이 옷장으로만 간소하게 채워져 있었지만, 한쪽 면을 전부 차지한 넓은 창과 그 너머로 보이는 넓은 테라스, 그리고 높은 천장에 달린 샹들리에 덕분에 심플함보다는 고급스럽다는 단어가 더 어울렸다. 침대에 풀썩 주저앉은 김독자는 다시 한 번 방안을 둘러본 뒤 습관처럼 혼잣말을 내뱉었다.

 

붉은 벽지에 금실 자수가 놓인 침구라니. 조금 부담스러울 정도네.”

 

마치 중세시대 귀족의 침실처럼 화려한 인테리어의 방은 김독자의 말처럼 성인남성이 혼자 사용하기에는 부담스러운 감이 있었다. 게다가 4개의 기둥에 휘장까지 달려있는 퀸사이즈의 침대에는 베개마저 2개가 놓여있었다. 신혼부부가 사용하면 딱 좋을 것같이 꾸며진 침대에 가만히 앉아있기가 고역스러웠던 김독자는 붉어진 얼굴로 헛기침하고는 벌떡 일어나서 괜히 옷장 문을 열어 안을 들여다보았다.

 

, 옷까지 다 준비돼있네?”

 

듣는 사람이 아무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어색한 말투로 혼잣말을 중얼거린 김독자는 옷장 문을 닫았다. 그리고 이번에는 욕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흰 대리석과 진짜 금인지 궁금해지는 번쩍이는 장식으로 꾸며진 욕실에는 마찬가지로 흰 대리석으로 만든 널찍한 세면대와 투명한 샤워부스, 두 사람이 들어가도 될 정도로 큰 욕조가 있었다. 욕조에 앉았을 때 보이는 정면과 천장에는 커다란 거울이 달려있었다. 김독자는 황급히 문을 닫고 욕실을 빠져나왔다.

 

방이 왜 이렇게 덥지? 에어컨을 틀어야겠네.”

 

에어컨 온도를 18도로 맞춰둔 김독자는 찬바람을 온몸으로 맞으며 방안을 서성였다. 유중혁과 1층에서 다시 만나기로 한 시간이 다 되었을 무렵에는 손이 덜덜 떨릴 정도로 온몸에 냉기가 돌았다. 입술이 파랗게 질린 김독자는 크게 한번 심호흡을 한 뒤 방을 나섰다. 유중혁은 이미 밑으로 내려간 듯 1층의 주방 쪽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김독자도 1층으로 내려와 주방으로 향했다. 유중혁은 냉장고를 열어 안을 확인하고 있었다. 웬일인지 유중혁은 들뜬 표정이었다.

 

일찍 내려왔네?”

, 내려왔나? 저녁은 데우기만 하면 될 것 같다.”

 

……? , 유중혁이 남이 만들어 놓은 음식을 먹겠다고 말한 건가? 김독자는 귀를 의심했다. 하지만 유중혁이 냉장고에서 꺼내 든 음식을 확인하고 단번에 납득했다. 유중혁의 손에 들린 것은 김독자에게도 매우 익숙한 음식이었다. 무림만두와 닭 국물. 1 무림에서만 구할 수 있는 음식이 어째서 여기에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한껏 신난 티가 나는 유중혁에게 그런 사소한 것쯤은 문제가 되지 않아 보였다. 부산하게 주방을 돌아다니며 대나무로 엮은 솥에 만두를 올려서 따끈하게 쪄내고, 뚝배기에 닭 국물을 담아 팔팔 끓이는 유중혁의 등을 바라보며 김독자는 생각했다.

 

먹을 거에 신난 유중혁이라니, 귀엽네.’

 

오늘의 메인요리들이 잘 데워지고 있는 동안 유중혁은 간단한 중국식 밑반찬까지 만들어냈다. 유중혁은 본인이 요리할 때 누가 옆에 있는 것을 싫어했기 때문에 김독자는 얌전히 식탁에 앉아서 두 손에 턱을 괴고는 요리하는 패왕의 모습을 구경했다. 한눈에 봐도 묵직함이 느껴지는 중화 팬을 한 손으로 잡고 휙휙 흔들어대는 모습은 가히 예술에 가까웠다. 자잘한 흉터가 있는 굵은 팔뚝에 잔뜩 선 핏줄, 불의 열기에 두꺼운 목을 타고 흐르는 땀방울까지. 살아 숨 쉬는 갈라테이아를 마주한 피그말리온의 기분이 이러했을까? 김독자는 아폴론의 현신도 유중혁의 미모 앞에선 빛을 바랄 것이라고 감히 자신할 수 있었다.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가 없는 상황에 김독자는 마음껏 유중혁의 모습을 감상했다.

 

김독자의 열렬한 시선에 유중혁의 등이 뚫리기 직전에서야 마침내 요리들이 완성되었다. 오늘의 메인요리인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무림만두와 닭 국물. 거기에 곁들일 중국식 가지볶음와 토마토 달걀볶음까지. 상에 차려진 요리의 가짓수는 적었지만 푸짐한 양과 먹음직스러운 모양새에 여느 진수성찬이 부럽지 않았다.

 

잘 먹겠습니다!”

많이 먹어라.”

 

단정한 젓가락질로 음식을 집어서 입에 넣고 바지런히 볼을 우물거리는 김독자를 바라보며 유중혁은 한껏 흐뭇한 기분을 느꼈다. 평소 먹는 것을 즐기지 않는 데다가 입까지 짧은 탓에 한 번에 많은 양을 먹지 않던 김독자였다. 한데 오늘은 꽤나 복스럽게 먹고 있어서 무척 보기가 좋았다. 평소에도 저렇게 잘 먹어서 두 뺨에 살이 포동하게 붙는다면 훨씬 보기가 좋을 텐데. 아무리 잘 먹여도 좀체 김독자의 두 볼에 살이 오르지 않는 것이 최근 유중혁의 고민 중 하나였다. 무림만두도 내려놓은 채 김독자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있던 유중혁은 벌써 배가 부른 건지 점점 젓가락질이 느려지는 김독자를 향해 말했다.

 

김독자, 편식은 좋지 못하다. 골고루 많이 먹어라.”

편식이라니. 충분히 많이 먹었다고.”

토마토 달걀볶음은 한입도 먹지 않은 것 같은데.”

중혁아, 토마토는 악마의 채소야. 사람이 먹을 수 있는 게 아니라니까?”

미아가 어릴 때도 편식은 하지 않았다.”

!”

비유도 편식하지 않는다.”

 

유중혁의 놀림에 못 이긴 김독자는 결국 투덜거리면서 토마토 달걀볶음을 깨작거렸다. 물론 유중혁은 김독자가 싫어하는 음식을 그에게 억지로 먹일 생각이 없었다. 김독자도 그걸 알고 있었다. 유중혁이 제 나름의 장난을 친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김독자도 장단을 맞춰준 것이다.

 

토마토 달걀볶음을 대신 먹어 줄 테니 무림만두를 두 개 더 먹어라.”

두 개나? 너무 많아. 만두 하나가 비유만하다고!”

 

김독자는 투덜거리면서도 착실하게 무림만두를 한입 베물었다. 그런 김독자를 바라보는 유중혁의 시선은 따스하다 못해 말랑하기까지 했다. 맛있는 음식 덕분인지 예상외로 식사시간은 어색하지 않게 흘러갔다. 두 사람은 편안한 분위기 속에서 농담까지 주고받으며 식사를 마쳤다.

 

함께 설거지까지 끝낸 뒤 두 사람은 거실로 이동해서 느긋하게 식후 티타임을 가졌다. 녹은 찹쌀떡처럼 소파 위로 늘어진 김독자는 배가 불러서 더는 아무것도 못 먹는다며 따뜻한 차만 조금씩 홀짝였다. ‘식후 과일은 소화에 도움이 된다.’며 껍질이 벗겨진 복숭아를 입에 넣어주려는 유중혁을 피하던 김독자는 귓가를 울리는 메시지에 한껏 귀찮다는 표정을 지었다.

 

다음 일정은 산책이군.”

조금만 더 있다가 나가자배가 불러서 못 걷겠어.”

걸어야 소화가 된다.”

, 정말 유중혁 못됐어!”

 

나는 못 간다!!!’라며 고양이처럼 온몸을 길게 늘여서 버티는 김독자를 달랑 들어 올린 유중혁은 단호하게 현관으로 향했다. 그리고는 숙소의 돌계단을 다 내려와서야 바닥에 내려주었다. 유중혁은 도주를 시도하는 김독자의 팔을 냉큼 부여잡고 텃밭 뒤로 이어진 산책로로 걸어갔다. 밥을 먹고 바로 걸으면 소화가 안 된다느니, 갑자기 들어 올린 바람에 체한 것 같다느니, 종알종알 불만을 토해내던 김독자는 대답 없이 저의 팔을 잡고 앞서 걸어가는 유중혁의 옆모습을 바라봤다. 저의 불만을 들은 체도 하지 않고 묵묵히 걷고 있는 유중혁의 빌어먹게도 잘생긴 얼굴은 해 질 녘의 붉은 빛으로 채색돼 한층 더 생동감 있고 아름다워 보였다.

 

화도 못 내게 하는 얼굴이네.’

 

오솔길 반대편에 있는 산책로는 숙소 뒤편의 숲으로 이어졌다. 낮은 키의 이름 모를 풀꽃이 양옆으로 소복하게 자라난 흙길을 걸으니 좋다.”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옆을 돌아보니 유중혁도 느슨하게 긴장을 풀고 있었다. 나른한 포만감에 상쾌한 기분까지 더해지자 더할 나위 없이 행복했다.

 

다른 사람들도 같이 왔으면 좋았을 텐데. 그렇지?”

그래. 아이들은 여기서 살겠다고 했을지도 모르겠군.”

하하, 그러게.”

 

산책로 끝에 있는 아담한 규모의 호숫가까지 한 바퀴 돌아본 두 사람은 군데군데 놓여있던 벤치 중의 하나를 골라서 나란히 앉았다.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며 해가 지는 것을 바라보던 두 사람은 지금이라면 내 마음을 꺼내도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동시에 떠올렸다. 하지만 두 사람이 만난 이래로 거의 처음 보내는 단란한 시간을 조금이라도 더 오래 지속시키고 싶은 마음은 같았기에 누구도 먼저 말을 꺼내지 못했다. 게다가 다시 시나리오가 시작되면 이렇게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는 것도 이번이 마지막일 수 있다.

 

게다가 막상 고백하려고 하자 혹시, 나와 같은 마음이 아니면 어떡하지?’ 같은 생각이 떠올라 덜컥 두려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만약에 고백을 거절당한다면 남은 휴가기간 동안 상대방의 얼굴을 보기가 힘들어지는 것은 물론이고 앞으로의 시나리오 진행에도 영향이 있을 거였다. 약간의 가능성이 두 사람을 망설이게 했다.

 

일정은 이제 시작됐고, 남은 시간은 충분하니깐.’

아직 4일이나 남았다. 떠나기 전까지 또 기회가 오겠지.’

 

[‘산책하기를 완료했습니다.]

[서브 시나리오 여름 휴가1일 차 일정이 종료됩니다.]

 

애써 자기합리화를 마친 뒤 불안한 마음 너머로 진심을 숨긴 두 사람의 사이로는 어둠이 내려앉을 때까지 가벼운 대화만 오갔다. 가로등 불빛으로 어둑하게 빛나는 산책로를 따라 숙소로 돌아온 두 사람은 곧장 각자의 방으로 돌아갔다. 방으로 들어온 김독자는 샤워를 하고 보송보송해진 몸으로 푹신한 침대에 누웠다. 잠이 절로 쏟아져야 하건만 마음 한구석이 불편해서 잠이 오지 않았다. 김독자는 머릿속을 어지럽히는 잡념을 애써 모른 척하며 무거운 눈꺼풀을 닫았다.

 

***

 

밤새 잠을 설친 탓에 두 사람 모두 피곤한 낯이었다. 하지만 그런 그들의 사정을 봐줄 리 없는 메시지는 아침 해가 떠오르기가 무섭게 귓가를 울려왔다. 2일차 시나리오의 시작이었다.

 

[서브 시나리오 여름 휴가2일 차 일정이 시작됩니다.]

[‘일정표 2일 차에 따라 시나리오를 진행하십시오.]

[앞으로 2시간 안에 기상 및 아침 식사를 끝마치십시오.]

 

메시지를 확인한 김독자는 욕실로 들어갔다. 한참을 샤워기 밑에 서서 머리 위로 쏟아지는 찬물을 맞았더니 그제야 졸음과 피로감이 조금은 씻겨 내려간 듯했다. 옷장에서 편한 옷을 찾아서 입고 1층으로 내려왔더니 유중혁은 김독자보다 먼저 주방으로 내려와 있었다.

 

잘 잤어?”

그래. 좋은 아침이군.”

 

밤새 누가 다녀간 것 같지도 않은데 냉장고는 가득 차 있었다. 음식재료를 확인한 두 사람은 간단하게 토스트와 오믈렛, 샐러드로 아침 식사를 때우기로 했다. 유중혁은 달걀과 우유, 버터를 섞은 달걀물을 만들어 폭신한 오믈렛을 만들었고, 김독자는 먼저 토스터에 도톰한 두께의 식빵을 넣어두고, 냉장고에 준비돼 있던 샐러드와 드레싱을 두 개의 접시에 나눠서 담았다. 넓은 접시에 오믈렛과 식빵 2, 그리고 샐러드를 담으니 그럴싸한 브런치 메뉴가 완성됐다.

 

유중혁과는 달리 아침잠이 많은 김독자는 졸음 기가 남은 얼굴로 느릿하게 포크를 움직였다. 입맛이 없는지 연신 오렌지 주스를 들이켜며 깨작거리는 김독자의 느린 속도에 맞춰서 아침 식사를 마친 뒤. 유중혁은 거의 반쯤 졸고 있는 김독자를 거실로 내보낸 뒤 몇 개 없는 설거지를 빠르게 해치웠다.

 

커피라도 한잔 마시겠나?”

, 정리는 끝났어? 나도 도왔어야 하는데. 잠이 깨질 않네.”

괜찮다. 얼른 정신이나 차려라.”

 

어디서 찾은 건지 유중혁은 직접 핸드밀로 원두를 갈아서 핸드드립으로 내린 커피를 김독자에게 건네주었다. 잔을 받아서 후후 불어 한 김 식히고 한 모금을 입안에 머금자 향긋하면서도 고소한 커피의 맛이 묵직하게 혀끝에 맺혔다. 유중혁의 만류에도 벌써 두잔 째 커피를 들이켜던 김독자는 문득, 미노소프트에 다니던 때가 생각났다. 벌써 오래전의 일이 됐음에도 불구하고 출근 후 진하게 커피를 타서 마시던 아침의 습관이 아직 남아있는 것인지 잠기운으로 멍했던 머리가 카페인으로 점점 맑아지는 것이 느껴졌다.

 

습관이란 게 참 무서운 것 같아.”

뜬금없군. 무슨 말이지?”

미노소프트에 다녔을 때. 꼭 아침마다 커피를 한 잔씩 마셔줘야 하루의 시작이 개운했거든. 그때 습관이 아직도 남아 있나 봐. 커피를 마시니깐 잠이 더 빨리 깨는 것 같아.”

빈속에 커피는 몸에 좋지 않다.”

알지만 그때는 어쩔 수 없었는걸. 잠이 덜 깬 채로 업무를 볼 순 없었으니깐. , 이제 그럴 일도 없긴 하네. 여하간 중혁이 네가 내려준 커피 너무 맛있다.”

 

두 사람은 커피를 홀짝이며 남은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주어진 2시간이 끝나기가 무섭게 두 사람의 앞으로 메시지가 떠올랐다. 메시지에는 각자의 방에 준비된 의상으로 갈아입고 함께 바다 수영을 하라는 내용이 적혀있었는데 준비된 의상이라는 부분만 유독 강조된 것이 뭔가 의미심장했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각자의 방에서 문제의 준비된 의상을 마주한 두 사람은 소리 없는 비명을 내질렀다.

 

이걸 어떻게 입으라는 거지!’

이게 뭐야?!!’

 

준비된 의상의 정체는 바다 수영이라는 단어에서 짐작했듯이 수영복이었다. 거기까지는 두 사람도 충분히 예상했다. 다만 두 사람이 놀란 것은 수영복의 생김새 때문이었다. ‘이건 너무 야한 거 아닌가?’ 수영복을 착용한 두 사람이 동시에 떠올린 생각이었다. 한참을 방에서 미적거리던 두 사람은 제한시간이 다 되었음을 알리는 메시지의 재촉에 못 이겨 방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1층에서 만나 서로의 복장을 확인한 두 사람은 도무지 눈 둘 곳을 찾을 수가 없었다.

 

유중혁의 방 침대 위에 다소곳이 올려져 있던 수영복은 긴 팔의 래시가드와 워터레깅스 세트였다. 평범하다고 할 수 있는 조합이었으나, 입는 사람이 평범하지 않았던 탓일까. 수영복을 입은 유중혁은 풍기문란그 자체였다. 큰 가슴과 꽉 조여진 복근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보일 정도로 여유 없이 딱 달라붙은 상의는 특히 가슴 부분이 금방이라도 터질 듯이 팽팽했다.

 

차마 빵빵한 가슴에 시선을 오래 둘 수 없었던 김독자가 고개를 내렸지만, 하의의 상태 또한 상의와 별반 다르지 않은 상태였다. 무릎까지 오는 기장의 워터레깅스는 은은한 광택이 도는 소재가 경악스러운 부피의 그곳과 튼실한 허벅지를 더욱 입체감 있어 보이게 강조했다.

 

동공에 지진이 난 김독자가 그나마 덜 문란해 보이는 종아리 부근으로 시선을 내리려는 찰나. 유중혁이 뒤를 돌아서 계단으로 향했다. 덕분에 미처 고개를 돌리지 못한 김독자는 유중혁의 탄탄하게 올라붙은 엉덩이까지 목격했다. 잘 올라붙은 엉덩이는 오늘따라 더 탱탱해 보였다.

 

손을 파닥파닥 흔들며 후끈하게 달아오른 얼굴을 식히는 김독자를 뒤로하고 먼저 1층으로 내려온 유중혁의 얼굴도 8월의 태양처럼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김독자가 입고 나온 수영복도 언뜻 보기에는 평범했다. 민소매 상의와 반바지가 세트인 비치웨어. 하지만 유중혁의 시선에 비치는 김독자는 야하기 그지없었다. 헐렁한 품의 흰색 상의는 어깨선이 다 드러나는 민소매에 속이 비칠 듯 얇디얇았고, 소매의 통도 넓어서 팔을 들 때마다 안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남성용이라기엔 다소 짧아 보이는 반바지는 늘씬하게 뻗은 다리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평소 긴 바지로 꽁꽁 가리고 있었던 탓인지 얇고 긴 다리는 뽀얗다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창백했다. 게다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통이 넓은 바지의 밑단이 말려 올라가면서 허연 허벅지가 슬쩍슬쩍 보였고, 바지의 길이가 워낙 짧아서 물에 들어가면 엉덩이까지 보일 것만 같았다.

 

김독자 몰래 속으로 참을 인을 꾹꾹 눌러 새긴 유중혁은 새빨개진 귀를 들키기 전에 급하게 뒤를 돌아 1층으로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

 

앞서가는 유중혁의 뒤를 김독자가 종종걸음으로 쫓아가는 묘한 구도로 바닷가에 도착한 두 사람은 시작부터 난관에 봉착했다. 일정표대로 따르자면 두 사람이 함께 바다 수영을 즐겨야 하는 데, 김독자가 바다 수영을 못한다는 변수가 있었다. 바다에서 수영해 본 적이 없었던 탓에 김독자도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물론 못 하는 것이 없는 패왕, 유중혁은 바다 수영마저도 마치 한 마리의 돌고래처럼 능숙하게 해냈다. 김독자는 왠지 모르게 진 느낌이었다. 여하간 민망한 차림새도 잊은 채 두 사람은 머리를 맞대고 고민했다.

 

결론은 같이 바다 수영만 하면 된다는 거지? 그럼 네가 나한테 바다 수영을 가르쳐 주면 되겠네!”

 

고민 끝에 나온 김독자 의견이었다. 얕은 꼼수가 들어가긴 했지만 문제 될 건 없어 보였다. 이렇게 해서 열리게 된 <패왕과 함께하는 수영강좌>는 순탄하게 시작되는 듯했다.

 

처음에는 두 사람 모두 시나리오를 클리어할 정도로만 하면 되겠지.’ 라는 마음가짐으로 가볍게 수업에 임했다. 다만 예상외로 더 굉장한 수중 오징어 쇼를 보여준 김독자 덕분에 어린이 수영교실 수준이었던 강의는 마치 여름대회를 준비하는 수영코치와 선수의 수영특강처럼 변질되고 말았다. ‘저 상태라면 바다가 나오는 시나리오에서 김독자가 물에 빠져서 죽을 수도 있겠군. 그렇게 만들 순 없지!’라는 생각에 쓸데없는 데서 성실함을 발휘한 유중혁과 도대체 유중혁은 못하는 게 뭐야? 쟤는 되는 데 왜 나만 안 돼!’라는 생각에 오기가 발동한 김독자의 합작품이었다. 두 사람의 합심으로 결성된 열띤 수업 덕분인지 드디어 김독자가 홀로 자유형에 성공하려는 찰나였다. 갑자기 안 쓰던 근육을 마구 혹사시킨 탓일까. 김독자는 발에 쥐가 나고 말았다.

 

같은 시각. 유중혁은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김독자가 자유형으로 헤엄쳐서 터닝 포인트 지점으로 정한 바다 위의 부표까지 갔다가 돌아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처음과는 비교도 안 되는 완벽한 자세로 물살을 헤치고 나가는 김독자의 모습에 유중혁은 뿌듯한 마음이 가슴 가득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점점 부표와 가까워지는 김독자의 모습을 확인한 유중혁은 물이 맺힌 얼굴을 쓸어내리기 위해 잠시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김독자의 모습은 바다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정말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김독자?”

 

당황한 유중혁이 텅 빈 바다를 보며 김독자의 이름을 부르는 순간, “푸흡!”하는 소리와 함께 김독자의 얼굴이 수면 위로 잠시 떠올랐다가 다시 가라앉는 모습이 그의 시야로 들어왔다. 그 모습을 본 유중혁은 다급하게 헤엄쳐 김독자가 떠올랐던 곳으로 갔다. 그리고 김독자가 떠오르지 않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숨을 한껏 들이마신 뒤 망설임 없이 바다속으로 잠수했다.

 

급한 마음에 수경도 쓰지 못한 눈은 바닷물 때문에 쓰려서 뜨는 것조차 힘겨웠지만, 유중혁은 눈을 부릅뜨고 주변을 둘러봤다. 다행인지 멀지 않은 곳에서 정신을 잃은 채 가라앉고 있는 김독자가 보였다. 유중혁은 김독자를 끌어안고 순식간에 뭍으로 올라왔다. 김독자를 바닥에 눕힌 유중혁은 호흡을 확인하고 능숙하게 고개를 젖혀서 기도를 확보한 뒤 인공호흡을 했다. 가슴팍을 세게 누르고 입으로 산소를 불어넣기를 몇 번이나 반복했을까. 좀처럼 호흡이 돌아오지 않던 김독자가 물을 왈칵 뱉어내는 순간 유중혁 또한 막혔던 숨이 돌아오는 것 같았다. 놀란 심장을 부여잡고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니 방금까지는 인지하지 못하고 있던 소리가 유중혁의 귓가를 울려왔다. 익숙하다 못해 지긋지긋한, 메시지 소리였다.

 

[히든 시나리오가 도착했습니다!]

 

+

 

<히든 시나리오 - 인공호흡>

분류: 히든

난이도: A

클리어 조건: 위기에 처한 동료를 구하고 인공호흡을 시도 하시오.

제한시간:

보상: A급 아이템, 동료의 ? ??

실패 시:

 

+

 

[히든 시나리오가 종료되었습니다!]

[보상으로 어느 대천사의 담요(A)’을 획득하였습니다.]

 

망할 시나리오 같으니. 워낙 갑작스러운 상황이었던지라 유중혁도 지금에서야 깨달았지만 김독자 컴퍼니 안에서는 최약체라도 김독자는 나름 설화급 성좌였다. 성좌가 고작 바다에서 쥐가 난 정도로 정신을 읽고, 물에 가라앉다니. 애초에 말이 안 되는 상황이었다. 고로, 조금 전의 위기 상황은 인위적으로 연출된 것이다.

 

예상대로라면 이 시나리오는 김독자에게도 갔을 테고, 그에게만 페널티가 있었겠지. 김독자는 갑작스러운 시나리오에 속수무책으로 당한 거다. 유중혁은 분한 마음을 씹어 삼키며 보상으로 떨어진 담요로 김독자를 말아서 품에 끌어안고 그가 눈을 뜨기를 기다렸다. 잠시 뒤, 김독자는 스르르 눈꺼풀을 들어 올리더니 유중혁의 얼굴을 쳐다봤다. 멍한 눈빛을 보니 아직 정신이 온전히 돌아온 것은 아닌 듯했다. 서서히 또렷해지는 김독자의 눈동자와 유중혁의 눈이 마주친 순간, 추가로 메시지가 날아왔다.

 

[최초로 동료의 첫 키스 상대가 되었습니다.]

[업적 보상으로 동료의 첫 키스를 획득하였습니다.]

 

보상을 확인한 유중혁은 혈압이 오르면 뒷골이 당긴다는 사실을 난생처음 몸으로 경험했다.

 

세상의 어느 누가 인공호흡을 키스로 친단 말인가? 심지어 상대방은 정신도 없는 상태였는데!’

 

어이없음을 넘어서 활화산의 용암처럼 화가 솟구친 유중혁은 씩씩거리며 허공을 노려보았다. 그리고 눈을 뜨자마자 유중혁과 같은 내용의 메시지를 받은 김독자는 다시 기절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조금 전. 김독자는 갑작스럽게 발에 쥐가 나서 당황한 순간 떠오른 [시나리오의 영향으로 페널티가 주어집니다. 해당 시나리오가 종료되기 전까지 모든 육체적 능력치가 초기화되며, 스킬 사용 또한 불가합니다.]라는 메시지를 끝으로 정신을 잃었다. 시나리오의 내용과 클리어 조건이 무엇인지 미처 확인도 하기 전에 일어난 일이다. 당연히 상황파악을 할 틈도 없었다. 그 때문에 가까스로 멍한 정신을 일깨우고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린 김독자는 유중혁의 품에 안겨있는 상황에 1차로 당황했고, 시나리오가 클리어 됐다는 알림에 2차로 당황했다.

 

시나리오가 클리어 돼서 내가 깨어난 모양인데.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지? 보상내용은 또 뭐고?’

 

전후 상황과 보상내용을 봤을 땐 유중혁이 인공호흡이라도 한 거 같았다. ‘그걸 첫 키스로 카운트하는 건 너무한 거 아니냐……김독자는 억울한 마음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게다가 결혼해서(회귀 전의 일이다.) 애까지 있었던(역시나 회귀 전의 일이다.) 유중혁인데, 나는 30살이 넘도록 첫 키스도 못 해본 사람이란 걸 들키다니!’ 수치스러워서 이대로 물거품으로 변해버리고 싶은 김독자였다.

 

김독자, 괜찮은 건가?”

, 입이 좀 짠 것 빼곤 괜찮아…….”

다행이군. 일단 숙소로 돌아가지.”

 

김독자가 완전히 정신을 차리자 유중혁은 숙소로 돌아가자는 말을 꺼냈다. 유중혁이 부축해주려고 했으나 김독자는 거부하고 스스로 일어섰다. 담요를 턱밑까지 끌어올린 채 혼자 걸을 수 있음을 온몸으로 어필하는 김독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유중혁은 말없이 김독자의 옆에 서서 걸음을 옮겼다. 충격적인 히든 시나리오 보상 때문인지 오솔길을 따라 숙소로 돌아오는 두 사람의 사이로는 침묵만 흘렀다.

 

숙소에 도착한 두 사람은 마음의 준비도 없이 첫 키스라는 일생일대의 의식(?)을 시나리오에 강탈당한 탓에 심적으로 너덜너덜해진 상태였다. 당장 쉬고 싶은 마음뿐이었지만 시나리오는 여전히 진행 중이었고, 점심 식사도 시나리오에 포함된 오늘의 일정이었다. 두 사람은 최대한 빠르고 신속하게 식사준비를 마친 뒤 간단하게 차린 음식으로 점심 식사를 대충 마쳤다. 그리고 설거지가 끝나자마자 얼른 각자의 방으로 도망쳤다.

 

저녁 식사 전까지는 다행히도 개인 휴식시간이었다. 따끈한 물로 샤워를 마친 김독자는 침대에 드러누워서 생각했다. ‘젠장. 이제 유중혁 얼굴은 어떻게 봐야하나. 내 연애는 시작도 하기 전부터 왜 이 모양인가!’ 이불이라도 뻥뻥 차고 싶은 기분이었지만 심신이 지친 탓인지 손가락 하나도 까딱하기 귀찮았다.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는 생각만이 끝도 없이 머릿속을 떠다녔다.

 

같은 시각. 마찬가지로 샤워를 마친 뒤 침대에 드러누워 있던 유중혁은 생각했다. ‘아무래도 이번 생은 망한 것 같다.’라고. ……회귀할까? 생각할수록 한숨만 나왔다. 망할 시나리오 때문에 고백도 하기 전에 정신이 없는 사람을 상대로 진도를 뺀 쓰레기가 되어버렸다. 정말 어처구니가 없는 상황이다. 게다가 이번 회차에서는 유중혁 또한 아까의 그것이 첫 키스였다. 회차의 초반에 김독자를 만나 여태껏 휘둘리기만 하느라 다른 사람을 만날 틈 따위는 없었고, 김독자에게 연애감정을 느낀 이후로는 감히 다른 사람과 몸을 나눌 생각조차 하지 않았었다. (나름 건전한 연애관을 가진 유중혁에게 마음 따로 몸 따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만약 아까의 보상내역 창이 김독자에게도 같은 내용으로 뜬 것이라면 김독자 또한 유중혁이 이 나이가 되도록 첫 키스도 못 해봤다는 사실을 알게 된 셈이다. 유중혁은 양팔로 얼굴을 가린 채 연거푸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서브 시나리오 여름 휴가2일 차가 진행 중입니다.]

[‘일정표 2일 차에 따라 시나리오를 진행하십시오.]

[다음 일정 동료와 함께 저녁 식사까지 10분 남았습니다.]

 

싱숭생숭한 마음을 채 가라앉히지도 못했는데, 시간은 야속할 정도로 빠르게 지나갔다. 이대로 침대에 파묻혀서 이불이나 뻥뻥 차고 싶은 두 사람의 마음을 알 턱이 없는 메시지가 모른 척할 수도 없게 재차 떠올랐다. 각자의 방에서 동시에 한숨을 폭내쉰 두 사람은 마음만큼이나 무거운 발길을 이끌고 침대를 벗어났다.

 

김독자가 방문 손잡이에 손을 얹었을 때 옆방에서 유중혁이 먼저 복도로 나오는 인기척이 들려왔다. 저도 모르게 숨을 죽이고 방 밖의 동향을 살피던 김독자는 계단을 내려가는 발소리가 들린 뒤 조금의 시간이 더 지나고 나서야 방을 나섰다. 역시나 유중혁은 먼저 내려간 것인지 1층의 주방으로 들어가는 그의 뒷모습이 보였다. 하고 심호흡을 길게 내뱉은 김독자는 두 주먹을 꽉 쥐고 비장한 발걸음으로 계단을 내려갔다.

 

김독자보다 먼저 내려온 유중혁은 저녁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가스레인지 위에 얹힌 뚜껑 닫힌 솥에서는 김이 솟아나고 있고, 깨끗하게 세척된 재료들은 유중혁의 손아래에서 차례로 해체됐다. 주방 앞에서 주춤거리던 김독자는 유중혁의 눈치를 보며 행주를 적시더니 식탁을 깨끗하게 닦은 후 테이블 매트를 깔고, 앞 접시를 놓고, 수저 받침대 위에 수저를 가지런히 올려뒀다. 어깨너머로 김독자를 힐끔 돌아본 유중혁은 말없이 요리를 계속했다. 딱히 저의 도움이 필요해 보이진 않았기에 김독자는 자리에 앉아 요리가 끝나기를 얌전히 기다렸다.

 

완성된 요리는 뜨끈한 김이 모락모락 솟아나는 해물 삼계탕이었다. 일반적인 삼계탕이 뽀얀 국물인 것에 반해 유중혁이 만든 해물 삼계탕은 국물이 빨간색이었다. 매콤한 냄새가 물씬 풍기는 빨간 국물에는 큼직한 전복과 새우, 살이 오동통하게 오른 낙지, 각종 한약재를 뱃속에 품은 닭까지 한 마리가 통째로 들어가 있어서 보기만 해도 입안에 군침이 돌았다. 유중혁은 솜씨 좋게 집게와 가위로 재료들을 한입 크기로 자르더니 김독자의 앞 접시 위로 덜어주었다.

 

많이 먹어라.”

, 잘 먹을게……

 

김독자는 젓가락으로 닭 다리 살을 작게 찢어서 후불더니 입에 넣고 찬찬히 씹어 삼켰다. 그리고 앞 접시를 들어서 국물을 한 모금 마시더니 굳었던 표정을 사르르 풀어 내렸다. 야들야들하게 익은 재료들은 비린내도 없이 재료 본연의 맛을 한껏 뽐내고 있었고, 닭의 진한 맛과 해물의 시원한 맛이 함께 우러난 얼큰한 국물은 환상 그 자체였다. 역시, 중혁이가 한 요리가 최고야! 조금 전까지 한껏 긴장해서 날을 세우고 있던 사람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유중혁의 맞은편에는 맛있는 먹이에 경계심이 허물어진 여우 한 마리가 눈을 휜 채 앉아있었다.

 

김독자의 가늘게 휘어진 눈과 입꼬리를 포착한 유중혁은 야심 차게 세운 계획이 성공한 것을 느끼곤 매우 흐뭇해졌다. 잘 숨겼다고 생각했겠지만, 인기척을 살피며 안절부절못하던 김독자의 기척을 유중혁은 방문 너머로 이미 감지했다. 그리고 이대로 경직된 분위기가 풀리지 않는다면 고백은 고사하고, 남은 기간 김독자와 서먹하게 지내게 될 것을 직감했다. 마침 바다 수영을 빙자한 수영특강과 예기치 못한 사고로 체력이 바닥났을 테니 맛있는 음식을 미끼로 분위기부터 풀자고 유중혁은 생각했다. 일명 <경계심 많은 여우에게 먹이를!>작전. 그리고 계획은 성공적이었다.

 

남겨뒀던 국물로 끓인 칼국수까지 말끔히 비운 김독자는 빵빵하게 솟은 배를 두드리며 거실의 소파 위로 늘어졌다. 식사하는 동안에는 삼계탕에 홀린 듯 완전히 무장 해제된 표정을 짓고 있던 김독자였지만 식사가 끝나고 설거지를 하는 동안에 다시 정신이 돌아온 듯 조금은 경직된 모습이었다. 하지만 이전보다는 확연히 말랑한 기운을 풍기고 있었기에 유중혁은 우선 이 정도로 만족하기로 했다.

 

한편, 김독자는 미쳤지, 미쳤어!’라며 한껏 자책 중이었다.

 

고작 삼계탕에 홀라당 넘어가서 골골거리는 모습을 보여주다니! 아니 그렇지만, 중혁이 요리인걸! 게다가 그냥 삼계탕도 아니고 전복까지 들어간 해물 삼계탕이었다고. 어쩔 수 없었어. 는 무슨 헛소리야! 내가 이렇게 먹을 거에 약했나?’

 

머릿속에 휘몰아치는 생각의 바다에 침몰해 허우적거리던 김독자는 흘끔 눈동자를 굴려 유중혁의 안색을 살폈다. 유중혁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말끔한 표정으로 맞은편의 소파에 앉아서 흑천마도를 닦고 있었다. 지금에서야 눈치챈 사실이지만 시나리오 업적보상 창의 내용은 [최초로 동료의 첫 키스 상대가 되었습니다.]였다. 게다가 업적 보상은 동료의 키스가 아니라 동료의 첫 키스였고. 그렇다면 아까 전의 그 인공호흡이 유중혁에게도 첫 키스였다는 말이 된다.

 

맙소사……

 

쌍방 첫 키스를 그딴 식으로 카운트하게 되다니! 하지만 저만 첫 키스인 건 아니었다는 점이 꽤 마음에 들었다. 연인의 과거 따위에 연연하지 않는 쿨한 남자인 김독자지만 연인의 처음을 모두 제가 가지고 싶다는 독점욕은 있었다. 솔직히 제가 알고 있던 멸살법의 유중혁은 전쟁 통에도 사랑을 하고, 애까지 낳았던 로맨티시스트였다. 그렇기에 이번 회차에서도 동료들 몰래, 또는 제가 사라졌었던 시점에 누군가를 만났을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유중혁은 다른 사람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혈기왕성한 성인 남성이 아닌가. 지금은 유중혁도 저를 좋아한다고 반쯤은 확신하고 있지만, 과거의 일까지는 김독자가 알 수 없는 영역이었다.

 

한데 그 패왕, 유중혁이 그 누구도 만나지 않고 다름 아닌 자신을 선택한 데다가 첫 키스까지 나와 했다니! (고작 인공호흡이었고, 아직 고백도 받지(하지) 못한 상황이라는 것은 김독자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나이 30이 넘어서 첫 키스를 했다는 것에 놀림을 받기는커녕 상대방 또한 저와 나눈 것이 첫 키스였다는 사실을 확인받게 된 김독자는 십 년 묵은 체증이 내려간 기분이었다.

 

티 나지 않게 김독자의 표정을 관찰하고 있던 유중혁은 시시각각 현란하게 변하던 김독자의 표정이 볼을 붉히는 것을 마지막으로 편안하게 풀어지는 것을 확인했다. 김독자는 모든 고민을 홀가분하게 끝낸 것 같았다. 조금 남아있던 경직된 기운이 말끔히 사라진 이유를 확실하게는 알 수 없지만 대충은 짐작할 수 있었다. 저만 첫 키스인 게 아니었다는 사실을 드디어 눈치챈 것이겠지.

 

부끄럽다고 도망갈 일은 없겠군.’

 

아직 시간은 3일이나 남았고, 위기의 상황도 해결됐다. 유중혁은 오늘의 성과로 망할 뻔한 분위기를 구해낸 것에 만족하기로 했다. 위기를 무사히 넘긴 두 사람의 귓가로 때마침 오늘의 일정이 끝났다는 메시지가 들려왔다. 하지만 두 사람은 곧장 자리를 뜨는 대신 거실에 머무르는 걸 택했다. 두 사람은 그 뒤로도 한참을 더 한 공간에 머물러 있었다.

 

***

 

몇 시간이 뒤. 이른 새벽이었다. 전날 늦은 시간까지 거실에서 늦장을 부리다가 거의 한밤중이 되어서야 각자의 방으로 돌아왔던 두 사람이다. 잠은 오지 않았지만, 다음 날의 시나리오 진행을 위해 눕자마자 잠을 청했던 유중혁인데, 애초에 졸리지 않았던 탓인지 평소보다 훨씬 이른 시간에 깨버리고 말았다. 이미 맑게 갠 머리와 말똥말똥해진 시야는 더 잠을 청해보아야 헛수고라고 주장했다. 항상 부지런히 움직이던 생활이 몸에 밴 탓인지 잠이 깬 이후로는 침대에 가만히 누워있는 것이 불편하게만 느껴졌다. 그 마음을 읽은 것일까?

 

[히든 시나리오가 도착했습니다!]

 

+

 

<히든 시나리오 아침 인사>

 

분류 : 서브

난이도 : ???

클리어 조건 : 제한시간 안에 취침 중인 동료를 깨워서 아침 인사를 나누시오.

제한시간 : 30

보상 : 1,000코인

실패 시 : 대천사의 전우애가 깃든 벌칙.

 

* 해당 시나리오에서는 과격한 언행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

* 시나리오를 클리어하기 전에 동료가 깨어나면 벌칙이 주어집니다.

 

+

 

침대에서 일어나 욕실로 향하려던 유중혁은 갑자기 눈앞에 떠오른 메시지 때문에 어정쩡한 자세로 굳어버렸다. ‘심심할 땐 시나리오가 딱이지!’라는 듯 히든 시나리오가 도착한 것이다. 아침 인사? 지금?? 여기서!!? 심지어 아직 씻지도 못했는데 제한시간까지 있다. 다급하게 샤워를 하고 나온 유중혁은 머리로 다 말리지 못한 채 김독자의 방문 앞에 섰다.

 

망설이는 유중혁을 재촉하듯 눈앞에 떠오른 메시지에 적힌 빨간색의 제한시간 숫자는 점점 빠르게 줄어들었다. 어제 히든 시나리오 보상으로 획득한 어느 대천사의 담요에서도 짐작하긴 했지만, 이번 시나리오는 우리엘의 작품이 확실했다. 김독자와 제가 붙어있을 때마다 묘하게 저가 더 기뻐하며 전우애니 뭐니 요란을 떨더니 결국 이런 일을 벌여놓았다. 사실 서브 시나리오 자체는 유중혁에게도 득이면 득이었지 실인 부분은 없었다. 그래서 두말않고 참여한 것이기도 했고. 하지만 거듭되는 히든 시나리오들은 유중혁을 곤란하게만 하였다.

 

우리엘…… 두고 보지.’

 

둘 사이의 급진전을 누구보다 간절히 기도하고 있는 우리엘의 마음을 알 리가 없는 유중혁은 고요히 분노했다. 유중혁의 분노와는 관계없이 빠르게 줄어든 제한시간이 어느새 10분밖에 남지 않았을 때. 유중혁은 김독자의 방 안으로 들어갔다.

 

끼이익

 

두꺼운 커튼이 꼼꼼하게 처진 방안은 수평선 위로 떠오르고 있는 태양으로 환하게 빛나는 밖과는 달리 깜깜하기만 했다. 눈치 없이 커튼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 한 줌의 햇빛조차 없었다면 사물을 분간하기도 어려웠을 정도로 어두웠다. 고요한 적막이 흐르는 공간에서 유일하게 소리가 들리는 곳은 방의 중앙에 놓인 침대였다. 유중혁이 침대로 다가가자 곤히 잠든 김독자가 베개에 반쯤 얼굴을 묻은 채 색색거리는 숨소리를 내고 있었다. 작은 숨소리에 유중혁은 심장이 간질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저도 모르게 김독자의 얼굴로 흘러내려 그의 얼굴을 가리고 있는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고, 천천히 손을 옮겨 김독자의 볼을 손으로 감싸던 유중혁은 어느새 잠에서 깬 김독자와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별처럼 빛나는 눈을 마주하자 입이 저절로 움직였다.

 

잘 잤나?”

 

분위기에 취한 것인지 스스로가 낯설 정도로 낮고 달콤한 목소리였다. 그리고 그 달콤한 목소리를 눈을 뜨자마자 코앞에서 들은 김독자는 쿵쿵 뛰는 심장을 느끼며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유중혁이 왜 내 침대 위에 있는 거지? 이거 꿈인가?’

 

이번 히든 시나리오는 먼저 일어난 사람에게만 주어진 터라 방금 잠에서 깬 김독자는 도무지 이게 무슨 상황인지 알 수 없었다. 매번 봐도 적응이 안 되는 유중혁의 조각 같은 얼굴은 왜 제 코앞에 있는 것이며, 제 볼에서 느껴지는 이 온기는 무엇인가? 굳어버린 김독자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유중혁은 이내 침대에서 일어나 방을 나가버렸다.

 

허락도 없이 들어와서 미안하다. 잠이 깼다면 씻고 밑으로 내려와라. 나는 먼저 내려가 있겠다.”

 

유중혁이 방을 나서기 전 남긴 말을 듣고도 한참을 멍하게 문만 쳐다보던 김독자는 곧 얼굴이 새빨갛게 타들어 갔다.

 

이건 반칙 아니냐고……

 

김독자는 달아오른 얼굴을 베개에 묻고 발을 동동 굴렀다. 흰 이불에 파묻힌 채 한참을 바동거리던 김독자는 거의 토마토처럼 보이던 얼굴색이 원래대로 돌아온 다음에서야 흐느적거리며 욕실로 몸을 옮겼다. 오늘도 아침부터 냉수샤워를 한 김독자가 주방으로 내려왔을 땐 이미 아침 식사 준비가 끝나있었다.

 

딱 맞춰서 왔군. 앉아라.”

 

오늘의 아침 식사 메뉴는 보들보들한 프렌치토스트와 통통한 소시지, 그리고 야채볶음이었다. 김독자는 상큼한 오렌지 주스로 입가심하고는 노릇하게 구워진 가지를 입에 넣었다. 고소하고 쫄깃한 맛이 입안으로 사르르 퍼졌다. 일어난 직후에는 입맛이 없어서 아침 식사를 거의 하지 않던 김독자지만 유중혁의 요리는 그런 사소한 문제쯤은 가뿐하게 무시할 수 있을 만큼 맛있었다. 복스럽게 잘 먹는 김독자를 확인한 유중혁은 그제야 본인도 식사를 시작했다.

 

아침 식사가 끝난 후 함께 설거지하고, 뒷정리를 마친 두 사람은 거실의 소파에서 시간을 보냈다. 홍차를 우려서 차게 식힌 뒤 얼음과 레몬즙을 넣은 것으로 입가심하던 유중혁은 생각했다. 어제는 위기를 기회로 만들어서 어색했던 분위기를 회복한 것에 더해 늦은 밤까지 꽤 좋은 분위기로 시간을 보냈다. 자러 들어가기 전에는 웃는 얼굴로 헤어지기까지 했다. 그리고 오늘 아침에는 답지 않기는 했지만 다정한 목소리로 아침 인사를 건네 김독자의 홍조 띤 얼굴도 보았다. 음식에 공을 들인 보람이 느껴질 정도로 아침 식사도 굉장히 좋은 분위기로 마쳤다. 이대로만 유지한다면 고백을 하는 건 문제도 아니고, 단번에 오케이 사인도 받아낼 수 있으리라.

 

다만 문제는 최적의 고백 타이밍을 어떻게 잡을 것인 가였다. 예정에 없던 시나리오였던지라 그 흔한 커플링은커녕 꽃다발조차 준비하지 못했다. 한데 고백마저 대충할 수는 없는 일. 유중혁은 우수에 젖은 듯한 눈길로 고민에 빠져들었다.

 

, 쟤는 그냥 멍 때리는 표정도 조각이네. 역시 패왕.’

 

같은 시각. 유중혁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턱이 없는 김독자는 고민에 빠진 그의 얼굴을 감상하며 속으로 주접을 떨고 있었다. 비록 벌써 휴가의 셋째 날이 돼 버리긴 했지만, 분위기는 한창 상승기류를 탄 상태였다. 이 기세를 잡아 고백만 하면 연애까지는 일사천리였다. 그 때문에 현재의 김독자는 고민 한 점 없이 머릿속이 꽃밭이었다. 기분도 좋은데 잘생긴 얼굴까지 눈앞에 있다니! 게다가 그 잘생긴 얼굴을 가진 사람은 제가 좋아하는 사람이다. 꽃잎이 흩날릴 것만 같은 기운을 핑크빛 오라를 퐁퐁 내뿜으며 김독자는 결심했다. 기왕 고백하기로 마음먹은 거 더는 질질 끌지 말고 오늘 해치워버리자고. 분위기는 갖춰졌고, 타이밍만 잘 잡으면 된다! 김독자는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조용히 결의를 다졌다.

 

[서브 시나리오 여름 휴가3일 차가 진행 중입니다.]

[‘일정표 3일 차에 따라 시나리오를 진행하십시오.]

[다음 일정은 뱃놀이입니다. 정해진 장소로 이동해 일정을 수행하십시오.]

 

동실하게 불렀던 배가 꺼질 때쯤 메시지가 귓가를 울렸다. 일정표에 적힌 장소는 산책길에 들렀었던 호수였다. 두 사람은 나란히 산책길을 걸어 호숫가로 이동했다. 한참을 걸어서 도착한 호숫가에는 차양이 달린 배가 한 척 세워져 있었다. 두 사람은 바로 좁은 나무다리를 건너 배에 올라탔다. 햇볕이 따가워 뱃놀이를 즐기긴 어렵지 않을까 봐 조금 걱정했지만 여러 겹으로 드리워진 차양 덕분인지 배 자체가 옵션이 붙은 아이템이라도 되는 건지 내부는 서늘했다. 등받이가 달린 푹신한 좌식 의자에 마주 보고 앉자 유중혁이 노를 젓기 시작했다.

 

작게 물방울이 부서지는 소리를 내며 호수를 가로지르는 배는 속이 들여다보일 정도로 투명한 호수 때문에 마치 허공에 떠 있는 것 같았다. 물 밑을 헤엄치는 이름 모를 색색의 물고기 떼를 구경하는 김독자의 얼굴은 호기심 많은 아이처럼 순수해 보였다. 몸을 배의 난간에 기대고 물밑을 보는 김독자에게 유중혁이 말했다.

 

그렇게 있다간 배가 흔들렸을 때 물에 빠질지도 모른다.”

그때는 네가 잡아주겠지. 이번에는 저번처럼 물에 빠뜨리지 않을 거지?”

 

장난스럽게 웃는 김독자가 말하는 저번이란 이번 회차가 막 시작됐을 무렵. 동호대교에서의 일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때의 나는 자신을 예언자라고 칭하는 수상한 사내를 시험하기 위해 어룡의 입속으로 그를 던져 넣었다. 조금은 기대했지만 역시나 사내는 뭍으로 나오지 못했다.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 분명했기에 미련 없이 자리를 떠났건만 어룡에게 먹혔던 사내, 김독자는 멀쩡히 살아 돌아온 것도 모자라 예상 못 할 기행으로 저를 매번 놀라게 하였다. 그때의 자신에게 너는 미래에 김독자를 좋아하게 될 것이다.”라고 말한다면 과연 믿을 수 있을까? 아마 믿지 못하겠지. 믿기는커녕 헛소리라며 가차 없이 칼을 뽑아들었을 것이다. 언제 이렇게 빠져들어 버린 걸까.

 

여긴 끊어진 다리도 없고, 어룡도 없다.”

그렇지. 여긴 평화로운 호수와 나를 삼키기에는 너무 작은 물고기뿐이지. 그래도 만약 그때로 다시 돌아간다면 너는 어떻게 할 거야? 이번에도 같은 선택을 할 거야?”

 

다시 돌아간다면이라. 생각해본 적은 없다. 하지만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고 해도 나는 아마 같은 선택을 하지 않을까. 그때의 나는 그런 사람이었으니깐. 세상에 버림받고, 믿음을 배신당하고, 반복되는 모든 것들에 한껏 지친 탓에 누구도 믿지 못할 정도로 닳아버린 사람. 그때의 나는 내게 주어진 최선의 정답을 택했다. 그때의 선택이 있었기에 지금도 있는 것이겠지. 그래서 지금도 내가 했던 과거의 선택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다만 조금 아쉬울 뿐.

 

나는 아마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고 해도 같은 선택을 하게 되겠지. 진부한 말이지만 그때의 선택이 있었기에 지금의 우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때 다른 선택을 했다면 지금의 우리도 다른 모습이겠지. 하지만

 

잠시 숨을 들이쉰 채 말을 고르는 듯 뜸을 들이던 유중혁이 이내 말을 이었다.

 

혹시나 그때와 같은 상황이 생긴다면, 이번에는 네가 무사히 돌아오기를 기다려주겠다.”

 

지극히 유중혁다운,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유중혁답지 않은 대답이었다. 하지만 그 짧은 대답 속에는 유중혁의 고뇌와 진심과 애정이 담뿍 담겨있었다. 김독자는 그것을 느낄 수 있다. 때문에 김독자는 그 어떤 대답을 들었어도 지금처럼 기쁘진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마치 사랑한다는 고백이라도 들은 것처럼 가슴이 술렁였다. 김독자는 긴장한 표정으로 저를 바라보는 유중혁을 마주 보곤 환하게 웃어주었다.

 

그래. 그때도 나는 너를 찾아갈게.”

 

[‘뱃놀이일정이 종료되었습니다. 다음 일정이 시작하기 전까지 숙소에서 대기하십시오.]

 

뱃놀이를 끝내고 숙소로 돌아오는 길. 두 사람은 말없이 산책로를 걸었다. 하지만 두 사람의 주위에 내려앉은 것은 어색한 침묵이 아닌 따스하고 포근한 무언가였다. 말로 전하는 것과는 또 다른. 그 어떤 것을 공유하며 두 사람은 천천히 길의 끝까지 걸어갔다.

 

***

 

[다음 일정 시작까지 남은 시간은 20분입니다.]

[다음 일정은 캠프파이어입니다. 동료와 힘을 합쳐 계획을 세우고, 필요한 물품을 구하십시오.]

 

만족스러웠던 오전 일정을 마친 뒤. 숙소로 돌아와 점심 식사를 마친 두 사람의 귓가로 메시지가 들려왔다. ‘캠프파이어익숙한 듯 낯선 단어였다.

 

중혁아, 캠프파이어 해본 적 있어?”

어릴 때 부모님과 해본 적이 있긴 하지만. 너무 오래전이라 기억은 잘 나지 않는다.”

뭘 했었는지는 기억나는 건 없고?”

불을 피워두고 그 앞에 앉아있었던 것만 떠오른다. 도움이 되지 못해서 미안하군.”

아냐. 나도 잘 모르는 건 똑같은걸.”

 

김독자에게 캠프파이어란 야외에서 장작에 불을 붙여두고 그 주위에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활동이었다. 그마저도 직접 겪어 본 것은 아니고, 유료화가 시작되기 전에 TV 채널을 돌리다가 우연히 예능 프로그램에 나오는 것을 스치듯 본 것이 전부였다. 그나마 유중혁이 유경험자였지만 기억은 흐릿한 듯했다. 두 사람은 머리를 맞대고 고민했고, TV에서 봤던 것을 토대로 계획을 세웠다.

 

1. 저녁으로 바비큐 해먹기.

2. 모닥불 앞에 앉아서 밤하늘 구경하기.

 

계획은 정해졌으니 이제 캠프파이어에 필요한 물품들을 준비할 차례였다. 숙소를 둘러보던 중 1층 거실과 이어진 테라스 구석에서 바비큐 화로와 테이블을 발견했고, 마당 한구석에는 모닥불을 피울 수 있게 큰 돌이 둥글게 둘린 자리와 돌과 조금 떨어진 자리에 원목 벤치가 마련되어 있었다. 숙소 옆에 있는 창고 바깥에 땔감이 쌓여있는 것까지 확인한 유중혁이 장작은 내가 패도록 하지.”라고 했기에 김독자는 바비큐에 쓸 음식재료를 준비하겠다고 말했다.

 

상의를 걷어붙이고 우람한 팔 근육을 뽐내며 장작을 패기 시작한 유중혁을 확인한 김독자는 숙소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얼마 뒤. 한가득 쌓여있던 나무토막을 신들린 도끼질로 모두 잘라버린 유중혁이 이마에 맺힌 땀을 쓸어 닦으며 숙이고 있던 허리를 폈다. 며칠 동안 검을 놓았다는 티를 냄인지 고작 이 정도에도 허리가 뻐근했다. 이번 시나리오가 끝나면 훈련 강도를 더 높여야겠다고 생각한 유중혁은 모닥불을 피울 자리에 장작을 잘 쌓아두곤 숙소 안으로 들어왔다. 시간이 한참 지났으니 지금쯤이면 김독자도 재료준비를 얼추 끝냈을 것으로 생각하고 주방으로 왔는데, 주방은 비어있었다. 김독자는 어디로 간 건지 보이지를 않았고, 씻다가 만 채소들만 덩그러니 싱크대 안에 놓여있었다. 그리고 식탁 위에 얹어진 하얀 물체를 본 유중혁은 그것을 들었다.

 

바비큐 재료

육류: 고기, 소시지

해산물: 조개, 새우

채소: 감자, 옥수수, 고구마, 양파, 대파, 버섯

 

이 정도면 되겠지...?

 

메모지에는 단정한 글씨체로 바비큐에 필요한 재료 목록이 적혀있었다. 김독자가 적어둔 듯했다. 채소란 밑에 작게 적힌 이 정도면 되겠지...?’까지 읽은 유중혁은 작게 웃음을 흘렸다. 메모지의 내용을 보아하니 아마도 김독자는 냉장고 채소 칸에 없는 재료를 찾으러 간 듯했다. 김독자의 메모지 옆에 놓인 또 다른 메모지에는 [냉장고에 없는 재료는 지하실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지하실 이용 시 주방 옆의 문을 이용하십시오.] 김독자의 행방을 알아낸 유중혁은 주방 입구 옆에 있는 문을 열고 지하실로 내려갔다.

 

김독자, 여기 있는 건가?”

, 중혁아! 장작은 다 팼어? 냉장고에 감자가 없는 거 있지. 그래, 으악!!!”

 

지하실에는 나무로 된 선반이 줄지어 서 있었고, 그 사이로 보이는 김독자는 쭈그려 앉은 채 선반의 맨 아래 칸에 있는 감자를 고르는 중이었다. 찾던 이를 발견한 유중혁은 김독자의 등 뒤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리고 갑자기 등 뒤에서 들려온 유중혁의 목소리에 반갑게 등 뒤를 돌아본 김독자는 꼬리를 밟힌 고양이처럼 화들짝 놀랐다.

 

왜 그러는 거지?”

? , 아냐. 아무것도!”

 

목소리가 꽤 멀리서 들렸기에 유중혁이 저의 바로 뒤에 서 있을 거라고는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예고도 없이 코앞으로 불쑥 들이밀어 진 유중혁의 얼굴에 김독자는 심장을 입 밖으로 뱉어낼 뻔했다. 벌렁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감자를 담은 소쿠리를 들고 일어나려던 김독자는 대차게 놀란 나머지 다리에 힘이 풀려서 중심을 잃고 말았다. 크게 휘청거리며 넘어지겠다!’라고 생각하는 순간 말랑하고 푹신한 무언가가 등을 폭 감싸 안았다.

 

뒤쪽에서 넘어온 손은 바구니를 불쑥 낚아채 갔고, 나머지 한쪽 팔은 김독자의 허리를 감아서 그를 달랑 들어 올렸다. 졸지에 유중혁에게 한쪽 팔로 안겨서 일으켜진 김독자는 바구니까지 강탈당해 빈손이 됐다. 김독자의 손에서 바구니를 가져간 유중혁은 나머지 재료들을 찾아 꼼꼼하게 골라 담은 뒤 그의 등을 바라보고 있는 김독자를 뒤로한 채 1층으로 돌아갔다.

 

뒤늦게 핫! 하고 정신을 차린 김독자는 유중혁의 뒤를 쫓아 주방으로 돌아왔다. 먼저 도착한 유중혁은 가져온 재료들을 씻고 있었다. 김독자는 얼른 달려가 유중혁의 손에서 감자를 뺏어 들며 재료준비는 내가 마저 해둘게!”라고 소리쳤다. 김독자의 얼굴을 한 번 본 유중혁은 순순히 싱크대 앞에서 비켜섰다. 그 짧은 시간 동안 빠르게도 움직인 유중혁 덕에 재료세척은 거의 끝난 상태였다. 조금 남은 재료들을 마저 씻은 뒤 김독자는 그것들을 몽땅 식탁 위로 옮겨두었다. 식탁 위에 늘어놓은 재료들을 바라보며 이걸 어떻게 하지?’ 잠시 고민하던 김독자는 도마와 칼을 꺼내고 일단 재료 손질부터 시작하기로 정했다.

 

나도 이 정도는 할 수 있다고!”

그래. 그럼 나는 바비큐 화로를 살피러 가보겠다.”

 

칼과 도마를 꺼내고 양파 껍질을 벗기며 순조롭게 준비를 시작하는 김독자를 확인한 유중혁은 이내 테라스로 나갔다. 그리고 다시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뒤. 깔끔하게 테라스 청소를 끝내고, 원목 테이블을 닦고, 바비큐 화로까지 반짝반짝 윤이 날 정도로 깨끗이 씻어서 불을 피워둔 유중혁은 지금쯤이면 주방 쪽도 준비가 끝났겠지.’라고 생각하며 주방으로 향했다. 그리고 주방으로 돌아온 유중혁은 참극이 일어난 주방의 전경을 마주하게 된다.

 

김독자이게 무슨 상황이지?”

아니, 중혁아 그게 말이지……

 

두 사람이 함께 다니기 시작한 이래로 유중혁은 김독자가 요리를 하는 모습을 제대로 본 적이 거의 없었다. 대체로 일행들과 함께 식사준비를 해왔던 터라 김독자가 혼자 요리를 할 일이 없기도 했다. 그리고 요리를 못해도 재료준비 정도는 할 수 있겠지.’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 이 전경을 보니 그 생각은 오판이었던 것 같다. 자취경력까지 있는 성인남성의 요리 실력이 이 정도로 처참할 줄이야. 패왕 유중혁도 감히 예상치 못했다.

 

깎았다고 하기 민망할 정도로 두껍게 잘려나간 껍질들은 약과였다. 분명히 바비큐용 재료였건만 꼬치에 꽂을 수도 없을 정도로 작은 크기로 썰린 엉성한 모양의 채소들과 고기의 모습은 처참하기만 했다. 다행히 새우와 조개는 손질할 엄두가 나지 않았는지 멀쩡한 외형을 유지하고 있었다.

 

김독자의 머쓱한 표정을 보니 본인도 의도한 결과는 아닌 듯했다. 한숨을 내쉰 유중혁은 남은 음식재료의 양을 확인했다. 고기를 비롯한 부재료들은 넉넉하게 남아있었고, 지하실에서 채소만 새로 가져오면 될 것 같았다. 시간도 충분했다. 언제쯤 유중혁이 화를 낼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눈치를 보던 김독자는 예상외로 유중혁의 반응이 나쁘지 않자 쭈뼛거리며 바구니를 챙겨 들더니 냉큼 지하실로 달려갔다. 후다닥달려가는 김독자의 동글한 뒤통수를 보고 한 번 더 한숨을 내뱉은 유중혁은 칼을 들었다.

 

이번에는 칼을 잡은 사람의 실력이 일류 호텔 주방장의 뺨을 서너 대는 후려갈길 급이다 보니 눈이 현란할 정도로 빠르게 재료들이 척척 준비되었다. 김독자가 썰어둔 재료들도 먹지 못할 모양새는 아니었기 때문에 유중혁은 그것들을 모아서 반으로 나누더니 절반은 고기와 함께 양념에 볶아 찹스테이크로 만들고, 나머지 절반은 더 잘게 썰더니 콥샐러드로 만들었다. 그리고 새로 준비한 재료들은 큼직한 모양으로 썰어서 원래의 계획대로 꼬치로 만들었다. 눈 깜빡할 사이에 가지런히 쟁반에 쌓인 꼬치와 두 가지의 요리를 본 김독자는 두 눈을 댕그랗게 뜨곤 연신 감탄사를 내뱉었다.

 

물론 김독자도 가만히 구경만 하며 서 있었던 건 아니었다. 재료를 옮기고, 유중혁의 지도를 받아서 채소도 씻었다. 앞선 실수를 만회하듯 바지런히 움직이며 열심히 유중혁을 도왔다. 손 한 쌍이 더 늘었을 뿐인데도 요리 숙련도의 차이가 크기 때문인지 김독자 혼자 준비를 했을 때보다 훨씬 빠르게 끝이 났다. 사실 요리며 재료 손질이며 중요한 것은 유중혁이 거의 다 처리하긴 했지만 그래도 함께준비했다는 사실에 김독자는 뿌듯한 기분이 들었다.

 

수고했다. 이제 재료는 얼추 다 준비된 것 같군.”

그럼 이제 나가볼까?”

 

두 사람은 주방 한편에 세워져 있던 주방용 카트에 뚜껑을 닫은 요리와 재료가 담긴 쟁반을 옮겨 실은 다음 카트를 끌고 테라스로 나갔다. 유중혁이 미리 청소해둔 덕분에 테라스는 먼지 한 톨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깔끔했고, 테라스의 중앙에 놓인 넓은 원목 테이블은 주름 한 줄 보이지 않는 따스한 색감의 밝은 베이지색 테이블보로 덮여있었다. 그 위에 놓인 테이블 매트와 식기들도 하나같이 광을 내며 반짝거렸다. 테이블과 조금 떨어진 위치에 있는 바비큐용 그릴 안에서 빨갛게 타들어 가고 숯까지 훑어 본 김독자는 카트에서 음식을 꺼내고 있던 유중혁을 향해 말했다.

 

내가 상상했던 바비큐 파티는 이렇게 호화판이 아니었는데……

이 정도면 평범한 수준이지.”

대체 어디가?”

 

유중혁은 우선 그릴 위에 조개와 새우를 얹고 뚜껑을 닫았다. 준비해온 재료들이 그릴 안에서 지글지글 익어가는 동안 두 사람은 시답잖은 대화를 나누며 식사를 시작했다. 주방에서 만들어 온 찹스테이크와 콥샐러드 그리고 지하실에서 찾아온 화이트 와인도 한 병 땄다. 먹음직스러운 요리에 풍미가 좋은 술까지 곁들여지자 미슐가이드가 선정한 3 스타 레스토랑이 부럽지 않았다. 시나리오가 시작되기 전에도 이 정도로 고급스러운 저녁 식사는 먹어본 적이 없었는데. 세계가 멸망하기 직전에 이르러서야 시나리오 덕분에 이런 호화로운 식사를 즐기게 되다니 굉장히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하지만 뭐 어떤가. 당장 다음 시나리오가 시작되면 맘 편히 밥한 끼 먹을 수 없는 생활이 일상이 될 텐데. 지금은 여유를 즐기고 싶었다.

 

다 익은 것 같군.”

 

와인 잔이 바닥을 보일 무렵, 잘 익은 새우와 조개의 고소한 향이 코끝을 스쳤다. 어느새 비어버린 찹스테이크 접시는 주방용 카트 아래 칸으로 치워졌고, 넓은 접시에 담긴 구운 새우와 조개가 테이블의 중간을 차지했다. 잠시 멈췄던 식사가 재개되고, 유중혁이 우아한 자세로 포크와 칼을 사용해 새우의 껍질을 벗겨내던 중이었다. 맞은편에서 새우의 몸통에서 껍질을 벗겨내기 위해 고전하고 있는 김독자가 그의 눈에 들어왔다. 부러지지 않는 신념으로 성좌며 마왕까지 잘만 썰어대고 다녔으면서 새우는 왜 못 까는 것일까. 조금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인상까지 써가며 고작 새우에 집중하는 모습이 조금 귀엽게 보였다. 그래도 잘 먹어야 살이 붙을 텐데 저렇게 먹어서 언제 살이 찌겠나. 김독자의 마른 몸을 한번 훑어본 유중혁은 김독자에게로 손을 뻗었다.

 

이리 줘봐라.”

 

손을 뻗어 김독자의 앞 접시를 슥가져온 유중혁은 김독자와는 달리 능수능란한 손길로 새우의 머리를 떼어낸 뒤 껍질을 홀랑홀랑 벗겨냈다. 그리곤 껍질이 훌렁 벗겨진 새우의 알맹이만 잔뜩 쌓인 앞 접시를 다시 김독자의 앞에 놓아주었다.

 

중혁아, 고마워.”

 

유중혁이 손수 까준 새우라니! ‘아까워서 이걸 어떻게 먹어!’라며 속으로 주접을 떨던 김독자는 이내 경건한 마음으로 새우의 통통한 몸통을 포크로 찍어서 입에 넣고 오물오물 입을 움직였다. 유중혁이 요리한 새우는 당연하게도 고소한 육즙이 입안에서 팡팡 터지는 환상적인 맛을 자랑했다. 게다가 유중혁이 직접 껍질을 까준 탓인지 한층 더 달게 느껴졌다. 햄스터처럼 볼을 부풀리고 열심히 새우를 먹는 김독자를 보던 유중혁도 만족스러운 듯 입가로 미소를 떠올렸다.

 

혼자서 거의 다 준비한다고 고생했어. 너도 많이 먹어.”

 

유중혁의 미소에 저도 배시시 웃음을 머금은 김독자는 포크로 조개구이를 한 점 콕 찍더니 유중혁의 입 앞에 들이댔다. 충동적으로 저지른 일인지 손을 내밀고 있는 김독자의 볼이 발그레했다. 잠시 머뭇거리던 유중혁은 김독자의 손을 자신의 손으로 꼭 잡고 포크에 집힌 조개를 받아먹었다.

 

제 눈을 바라보며 제 손을 향해 입을 벌리는 유중혁이 치명적일 만큼 야해 보여서 김독자는 그에게 잡혀있는 손을 바르르 떨었다. 손에 닿을 듯 가까워진 유난히 촉촉해 보이는 입술 사이로 보이는 붉은 혓바닥이 입술을 쓱 핥더니 다시 입속으로 사라질 땐 목이 타는 듯했다. 김독자의 손 쪽으로 몸을 기울인 채 팔을 뻗고 있던 유중혁이 다시 자리로 돌아갔을 때는 이미 김독자의 얼굴이 토마토처럼 붉게 달아오른 뒤였다.

 

그렇게 주거니 받거니 서로에게 음식을 집어주며 두 사람은 다정하게 저녁 식사를 마쳤다. 한껏 달아오른 분위기는 두 사람이 기다리고 있던 순간이 성큼 다가왔음을 알리는 듯했다.

 

두 번째 계획인 모닥불 앞에 앉아서 밤하늘 구경하기.’로 넘어간 두 사람은 사이좋게 핫초코를 한 잔씩 들고 모닥불 앞의 벤치에 나란히 앉았다.

 

벌써 여름 휴가를 온 지 3일이나 됐군.”

시간이 참 빠르다. 마지막 날은 일찍 돌아가야 할 테니깐, 이제 휴가도 하루밖에 안 남았네.”

돌아가면 다시 숨 쉴 틈도 없이 바빠지겠지.”

 

유중혁의 말처럼 여름 휴가 시나리오를 끝내고 [공단]으로 돌아가면 다음 메인시나리오 시작까지 남은 시간은 단 5일이다. 다음 메인 시나리오를 돌파할 계획을 세우고 단단히 방비를 갖추기에 5일이라는 시간은 매우 짧은 시간이다. 빡빡한 일정을 문제없이 소화하려면 지금처럼 쉴 수 있는 시간도 한동안 없을 것이다. [공단]에 남아있는 일행들이 마냥 손 놓고 놀고만 있지는 않았겠지만, 제 손이 닿아야만 하는 일들은 분명 존재했다. 꿈같은 여름 휴가를 마치고 현실로 돌아가면 애써 잊고 있던 일들이 제게로 물밀 듯이 밀려오겠지. 하지만 그것은 현실로 돌아간 이후에 생각할 일이다. 김독자는 이 순간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에 집중하기로 했다.

 

지금 이 순간이 아니라면 할 수 없는 일.

가령, 쏟아지는 별빛을 온몸으로 받으며 제 눈을 바라보는 유중혁의 눈을 들여다보는 일 같은.

 

 

마주 본 두 사람은 예감했다. 지금, 이때라고.

 

김독자, 네게 꼭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

중혁아, 듣고 있어. 그 말은 내가 네게 전하고 싶었던 그 말과 같을 거야. 하지만 나는 꼭 그 말을 네 목소리로 듣고 싶어.”

나는, 말이다. 언제부터였던 건지는 모른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내 눈은 너를 찾고 있었다. 네가 내 곁에 없을 때조차, 매 순간 네 흔적을 쫓고 있었다. 늘 혼자여도 괜찮다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혼자가 되고 싶지 않다. 함께이고 싶다.”

나도 늘, 너를 찾아가고 있었어. 네가 나를 몰랐을 때도 내 곁에는 늘 네가 있었어. 네가 아니었다면 지금의 나는 없었을 거야. 내 모든 생의 의미는 오직 유중혁, 너뿐이야.”

 

나는 김독자, 너를

 

중혁아, 나도 너를

 

작게 울린 애틋한 단어는 두 사람의 귓가에 맺혔다.

이내 흘러내린 단어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이미 두 사람의 마음에 스며든 것은 사라지지 않았다.

 

***

 

모닥불이 사그라질 때쯤 그 앞에 놓인 벤치 위에는 텅 빈 머그잔 두 개만이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모닥불 너머로 보이는 고풍스러운 2층짜리 별장은 누군가 급하게 들어갔었던 것처럼 현관문이 반쯤 열려있었다. 현관문을 지나쳐 2층의 복도로 올라가면 보이는 두 개의 문은 첫 번째 문 하나만 굳게 닫혀있었다. 비밀스러운 무언가를 방해받고 싶지 않다는 듯. 문이 잠겨진 채 커튼마저 처진 그 방은 작은 소리만을 밖으로 흘려내며 한 줌 별빛의 방문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그 안은 오롯이 두 사람만의 공간이었다.

 

***

 

[서브 시나리오 여름 휴가가 종료되었습니다!]

[히든 클리어 조건을 달성하여 시나리오가 조기 종료됩니다!]

[남은 기간 별도의 시나리오 진행 없이 시나리오 지역에 체류할 수 있습니다.]

[시나리오 지역 이탈을 원할 때 포탈을 이용하십시오.]

[추가 보상 정산이 시작됩니다.]

 

 

! 시나리오 종료됐데요.”

독자 형은 바로 돌아오려나?”

, 너는 눈치가 죽은 게 아니라 처음부터 없었던 게 분명해.”

“‘히든 클리어 조건달성이라우리가 사장님의 사생활까지 알아야 할 필요가 있을까요?”

 

[공단]에 남아있던 김독자 컴퍼니 일행은 이른 아침 서브 시나리오가 종료됐다는 메시지를 받았다. 예정보다 빠르긴 했지만 예상하던 결과라 놀랍지는 않았다. 이길영의 눈치 없음을 타박하는 신유승의 뒤로 나타난 정희원이 떨떠름하게 중얼거렸다. 정희원의 말에 <더 보기> 내용을 떠올린 일행들 또한 떨떠름한 표정이 되었다. 독자 형의 조기귀환을 기도하는 이길영에게는 안타까운 일이지만 <더 보기> 내용으로 인해 시나리오가 조기 종료된 것이라면 두 사람은 금방 돌아오지 않을 터였다. <서브 시나리오 - 여름 휴가>의 제한시간은 5일이고, 아직 제한시간까지는 이틀이 더 남아있었으니깐.

 

글쎄, 유중혁이 곱게 보내줄지 모르겠네.”

독자 씨도 일찍 올 것 같지는 않은데요.”

~창 좋을 때일 텐데 오고 싶겠어? 5일 꽉 채우고 나올 것 같으니깐 우리끼리 먼저 준비하고 있자.”

추가 보상으로 받은 고구마랑 사이다는 간식으로 구워 먹죠.”

 

대충 상황을 짐작한 어른들과는 달리 이길영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이길영과는 달리 조숙했던 신유승은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뭐야, 신유승 너는 뭐 알고 있지?”

너만 모르는 거야. 바보야.”

 

다시 토닥거리며 다투기 시작한 아이들을 뺀 나머지 일행들은 아침 식사 준비를 하기 위해 주방으로 몰려갔다. 오늘도 어제와 같은 평화로운 하루의 시작이었다.

 

***

 

 

<서브 시나리오 여름 휴가>

분류 : 서브

난이도 : C

클리어 조건 : 시나리오 지역으로 입장하여 주어진 일정표에 따라 여름 휴가를 보내시오.

제한 인원 : 2

제한시간 : 5

보상 : 100,000 코인, 동료와의 ???

실패 시 :

 

 

[해당 시나리오 지역은 입장 인원수에 제한이 있습니다.]

[포탈로 입장하면 시나리오 지역으로 전송됩니다.]

[시나리오가 종료되기 전까지 시나리오 지역을 이탈할 수 없습니다.]

 

 

<더 보기>

 

히든 클리어 조건: 일행들에게 고구마를 먹이던 썸을 끝내고 고백에 성공하시오.

추가 보상: 잘 익은 고구마, * 사이다

 

[해당 시나리오에는 숨겨진 클리어 조건이 존재합니다.]

[히든 클리어 조건을 충족할 시 시나리오가 조기 종료됩니다.]

[시나리오 조기 종료 이후에도 남은 기간 별도의 시나리오 진행 없이 시나리오 지역에 체류할 수 있습니다.]

[시나리오 지역 이탈을 원할 때 포탈을 이용하십시오.]

 

 

하몽 - 여름휴가 :: 2019. 8. 15. 01:31 소설